76세를 일기로 22일(현지시간) 별세한 영국 가수 오지 오즈번(존 마이클 오즈번·오지 오스본)은 헤비 메탈의 원형을 제시한 보컬로 통한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 ‘블랙 사바스’ 프런트맨으로 이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헌액자다. 강렬한 목소리와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로 전 세계 록스타들의 우상으로 손꼽힌다.
2000년대엔 가족들과 출연한 미국 MTV 리얼리티쇼 ‘오즈번 패밀리(The Osbournes)’에서 음악계의 악명 높은 모습과 달리 코믹한 모습을 선보이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오즈번은 과거 여러 번 은퇴를 선언했다. 1992년 ‘노 모어 투어스(No More Tours)’를 돌았고, 2018년엔 ‘노 모어 투어스 II’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지난 4일 고향인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페스티벌에서 연 콘서트가 마지막이 됐고, 18일 만에 팬들에게 영원한 작별 인사를 고했다.
당시 검은 왕좌에 앉아 관객들의 열광에 감동한 그는 블랙사바스의 오리지널 멤버들을 재결합시키며 영화 같은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블랙 사바스의 원년 멤버 전원이 무대에 함께 오른 건 20년 만이었다.
‘어둠의 왕자’라는 별명을 달고 다닌 오즈번은 특히 로큰롤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오즈번 패밀리’는 그의 악명과 사탄적 이미지에 대한 취향을 코믹하게 대조했다. 오즈번은 1992년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무대 위의 광기는 제가 맡은 역할이자 내 일이다. 난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전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오즈번은 1948년 12월3일 버밍엄에서 발전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공구 제작자 존 토마스 오즈번과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주간 근무를 하던 릴리언 오즈번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계층의 집에서 자라난 그는 난독증과 주의력 결핍 장애를 앓고 있었고 학업에도 무관심했다.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도축장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절도로 체포됐을 당시 그의 부친이 벌금 납부를 거부해 3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오즈번의 부친은 하지만 아들의 록가수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장비를 사주는 등 지원했다. 오즈번은 1968년 버밍엄에서 베이시스트 기저 버틀러, 드러머 빌 워드,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와 함께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이 팀은 블루스 밴드 ‘어스(Earth)’ 등의 팀명을 거쳐 이탈리아 ‘공포 영화의 대부’ 마리오 바바가 감독하고 배우 보리스 칼로프가 주연한 영화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1963)에서 영감을 받아 팀명을 바꿨다.
또한 초기 곡 중 하나에 이 이름을 사용했다. 해당 곡은 블랙사바스의 음악적 틀을 제시했다. 귀청이 터질 듯한 볼륨과 템포가 끊이지 않는 곡에서 파멸의 징조에 대해 울부짖었다.
블랙사바스는 1970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이후 8년 동안 7장의 앨범을 더 발매했다. 그런데 밴드의 음악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라디오 방송국에선 홀대를 받았다. 그러나 앨범은 꾸준히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파라노이드’, ‘아이언 맨’, ‘워 피그스’와 같은 곡들은 시대에 반감을 가진 젊은이들의 찬가로 통했다.
오즈번은 2006년 블랙 사바스 멤버로, 작년 솔로 아티스트로 두 번이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메탈리카의 라스 울리히는 블랙 사바스를 헌액했을 당시 “엄청난 파멸의 찬가다. 헤비 음악계에서 하나의 장르를 정의하는 데 있어, 사바스는 독보적”이라고 말했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은 올해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여덟 살 때 블랙 사바스의 ‘마스터 오브 리얼리티(Master of Reality)’를 처음 들었고 이후 음악가로서 그 사운드를 쫓았다. 그들에게 끌렸던 이유는 우주적인 권태감과 그들만이 가진 어두운 따뜻함”이라고 말했다.
밴드 마운틴 고츠와 함께 오즈번을 주제로 한 EP를 발매하고 블랙 사바스에 대한 소설을 출간한 작곡가 겸 작가 존 대니얼은 뉴욕타임스에 “오지의 보컬 라인은 코드 진행을 끊임없이 따라가는데, 강렬한 사운드를 내기보다는 라인을 강조하는 방식을 찾아냈다”고 들었다.
오즈번은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팀의 명성이 커지면서, 그의 행동 역시 과도해졌다. 음반사 회의에서 살아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특히 1982년 미국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라이브공연 중 살아있는 박쥐의 머리를 물어뜯은 사건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팬이 무대 위로 던진 박쥐였는데, 오즈본은 뒷날 고무 장난감인 줄 알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오즈번은 관객들에게 날고기를 던지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메탈 팬들은 그의 언행에 열광했지만 전 아내가 폭행당하는 등 현실에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연이어 발생했다.
1995년 세계적인 음악 축제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에 출연하고 싶어 했지만 거절당해 이듬해 ‘오즈페스트(Ozzfest)’를 시작하게 된 것도 유명 일화다.
‘오즈페스트’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밴드들이 참여하는 수익성 높은 여름 패키지 투어로, 2018년까지 장기 공연을 이어갔다. 헤드라이너는 오즈번이 맡았고, 종종 블랙 사바스가 출연하기도 했다.
2022년엔 열세 번째 솔로 스튜디오 앨범 ‘페이션트 넘버 나인(Patient Number 9)’을 발매하며 저력을 과시하는 등 말년까지 역동적인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2019년 척추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고 공개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만성 약물 남용으로 이 병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왔다. 22일 고향인 버밍엄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