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규제의 역설] ⑪규제 이후, 우리의 대응 방향은

[총량규제의 역설] ⑪규제 이후, 우리의 대응 방향은

이제 금융은 ‘얼마나 절박한가’보다 ‘얼마나 갚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총량규제는 가계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실수요자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났다.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고금리 대안만 남았다. 이 시리즈는 ‘총량’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현실을 추적한다. 고금리에 내몰린 청년과 서민, 구조적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복귀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융의 자기모순을 다룬다. 정책은 숫자를 관리했지만, 삶은 계산 바깥에 있었다. 규제의 목적은 무엇이며, 금융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한다. [편집자주]
[그래픽=안중열 기자챗·gpt]

[직썰 / 안중열 기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3단계가 전면 시행된 2025년, 한국의 가계대출 규제는 정점에 도달했다. 총량은 줄었고, 통제는 정밀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제도권 금융의 문은 실수요자에게 더 좁아졌다. 반복된 탈락과 단절 속에서 남은 질문은 분명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금융은 설계됐는가.”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는 ‘설계로서의 규제’라는 핵심 개념을 통해, 지금 금융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되묻는다.

◇숫자는 줄었다, 그러나 누구를 회복시켰는가

총량규제와 DSR은 분명한 정책 성과를 남겼다. 2021년과 비교해 가계부채 증가율은 절반 이하로 낮아졌고, 국제 신용등급의 방어에도 일조했다. 하지만 삶의 회복까지 이뤄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2025년 상반기 기준으로 제도권 대출에서 탈락한 뒤 복귀를 포기한 비율은 57.8%에 달한다. 절반이 넘는 이들이 단지 ‘다시 시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다시는 시도할 수 없음’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단절의 깊이는 생각보다 크다. 금융은 더 이상 위험을 완충하는 장치가 아니라, 실패를 고착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통제의 강도가 아니다. 회복을 전제로 한 금융 설계 부재는 근본적인 한계다. 통제가 잘 작동하더라도 회복의 길이 닫혀 있다면, 금융은 기능을 잃는다.

◇고정 수치 아닌 삶의 맥락, 모듈형 DSR의 확장 과제

현재의 DSR은 40%라는 고정 수치로 전 국민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대출을 받는 목적과 상환 능력, 그리고 생애주기마저 제각각인 현실에서 단일 수치로 모든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이 점에 주목해 서울시와 금융연구원이 공동 시범 운영한 ‘모듈형 DSR’은 삶의 맥락을 제도화하는 실험으로 주목받았다.

모듈형 DSR은 주거 목적 대출자의 통신비, 임대료 납부 이력 등 긍정적 생활 지표를 반영해 DSR 한도를 50%까지 유연하게 확대했고, 소비 목적 대출자는 30%로 제한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이 모델을 적용한 결과, 연체율은 18.6% 감소했고, 금융 접근성은 27.3% 증가했다. 회복의 여지를 제도화했을 때 금융의 실효성도 함께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필요하다. 현행 금융감독 체계는 중앙정부의 일률적 기준에 기반하기 때문에 지역별 맞춤 실험의 제도화를 어렵게 만든다. 모듈형 DSR이 안착하려면 정책금융기관이 생활 맥락 변수를 표준화하고, 이를 반영하는 신용 평가 알고리즘을 설계한 뒤, 민간 금융사와 데이터 기반으로 공유하고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데이터-제도 인프라, 즉 ‘DSR 정밀도 인프라’의 구축이 확산을 위한 선결 과제다.

◇회복 점수 기반의 정책금융, 그리고 민간 확산의 조건

금융당국은 2025년 하반기부터 ‘회복 점수 기반 정책금융 연계 플랫폼’을 도입해 본격 운영에 나선다. 납세 이력, 고용 상태, 생활비 납부 기록 등 다양한 비금융 데이터를 통해 개인의 회복 가능성을 수치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도권 금융에 복귀할 수 있는 경로를 설계하는 구조다.

경기도 시범사업에서는 회복 점수 상위 30% 가운데 41.2%가 실제로 1금융권 진입에 성공했다. 고정된 신용등급이 아닌 ‘회복 점수’라는 동적 지표가 새로운 금융 접근성의 척도로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민간 금융권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강제가 아니라 유인 설계가 필요하다. 민간 금융기관, 특히 1금융권은 보수적 리스크 회피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회복 가능성이 높더라도 신규 진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정책보증을 연계한 인센티브 구조가 필요하다. 회복 점수가 높은 차주에게는 정부가 일정 부분 보증 또는 재보증을 제공함으로써 민간금융의 리스크 부담을 완충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회복 점수와 연동된 금리 차등 설계도 병행돼야 한다. 신용 회복 가능성이 높은 차주에게는 낮은 가산금리를 제공함으로써, 민간금융에도 수익성과 사회적 기여를 동시에 유인할 수 있다.

정책금융과 민간금융이 이러한 신뢰 시스템을 공동으로 설계할 때, 비로소 금융은 단절이 아닌 회복의 사다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금융정책의 다음 방향, 통제에서 복원력으로

총량규제는 정책적으로 유지돼야 할 도구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정책이 수치를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고, 실패 경험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재진입의 가능성마저 닫는다면, 그것은 기능하는 규제가 아니라 제약의 구조에 불과하다.

앞으로 금융정책의 방향은 통제 중심에서 복원력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수치를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개개인 삶의 흐름과 맥락에 기반한 정밀한 규제 시스템이 필요하며, 실패를 전제로 퇴출을 설계하는 금융이 아닌, 회복을 전제로 다시 설계된 행동 시뮬레이션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금융 규제는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가능성을 증명해 가는 지도로 작동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시작되려면 정부는 단순한 규제자가 아니라, 설계자이자 신뢰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데이터를 통합하고 검증하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고, 정책금융은 회복 가능성을 수치로 입증해야 하며, 민간금융은 그 가능성에 투자하는 구조적 삼각 편대를 구축해야 한다.

◇총량규제의 역설이 남긴 마지막 질문

지금까지 ①~⑪편에 걸친 시리즈는 단지 규제의 부작용을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규제의 이면에 가려졌던 실패와 단절을 추적했고, 설계 가능한 금융이라는 구조적 가능성을 실증했다. 모든 분석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이제 금융은 단순한 리스크 관리 도구가 아니라, 삶의 단절을 다시 연결하는 회복의 인프라로 작동해야 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까지 오는 동안 질문은 명확해졌다. 금융은 이제, 누구를 위해 설계돼야 하는가.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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