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오늘 밤, 당신의 꿈에 나타날게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25에서 각인된 여섯 개의 서늘한 장면들.
우리 삶이 유한한 픽셀이라면
〈토탈 픽셀 스페이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대목은 AI 영화에 대한 관심이었다. 지난해 국내 영화제 최초 AI 전용 국제 경쟁 섹션을 도입한 이래, 올해는 아예 전설적인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모든 시나리오를 AI가 학습한 뒤 작성한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그를 찾아서〉를 개막작으로 상영했다. AI 경쟁 부문에 오른 11편의 단편 중에서 제3회 AI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토탈 픽셀 스페이스〉가 단연 눈에 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이미지에 관한 최면에 가까운 초현실적 에세이다. 영화는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유한한 픽셀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토탈 픽셀 스페이스는 당신의 삶 전체를 담은 영상, 당신이 살아보지 않은 모든 삶, 지구 위 또는 바깥에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생명체와 사물의 삶을 모든 각도에서 담고 있다. 인류의 역사 전체, 모든 인간의 초상, 외계 문명의 흥망, 모든 구름, 모든 산, 티끌 하나까지, 모든 파장의 빛으로. 모든 꿈, 모든 미래의 과학적 발견, 심지어 물리 법칙과 논리를 거스르는 이미지까지.” 그렇다면 우리 삶의 모습은? 이 또한 토탈 픽셀 스페이스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연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인공지능 내레이션이 답한다. 마치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 섬뜩하다. 우리는 시간을 흐르는 강처럼 느끼지만, 그것은 사실 좌표로 존재하는 정지된 순간들의 방대한 집합일 수 있다고. 그러니깐 인간의 의식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좌표를 향해가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
보르헤스는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 전체를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상상했다. 도서관 거주자들은 모든 지식이 여기에 있다며 환호하지만 이내 절망에 빠진다. 의미 있는 책, 무의미한 책, 모든 인류의 과거와 미래,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르는) 당신의 삶의 정확한 기록까지. 모든 진리와 모든 거짓이 혼재되어 있는 세계에서 도서관의 책은 인간에겐 그저 무의미한 문자의 배열일 뿐이니까. 오늘날 AI에 대한 인류의 열망도 비슷한 양상이다. 우리는 초국적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에 우리 삶을 저당잡히고, 챗GPT의 거짓말에 놀아나면서도 기꺼이 AI라는 마법을 신격화하기로 합의했다. 미술비평가 벤 데이비스(Ben Davis)가 이 영화를 보고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을 떠올린 건 지극히 논리적이다. 바벨의 도서관에 영감을 받은 아나돌의 ‘Archive Dreaming’이 AI 미래에 대한 예찬이라면, 이 영화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그렇다고 관습적 반대에 그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AI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유를 보다 풍부하게 이끄는 사고 실험에 가깝다. 이 영화와 나머지 열 개의 단편이 바벨의 도서관 거주자만큼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실존적 안내서인 이유다.
이것은 AI 영화가 아니다
〈그를 찾아서〉
피오트르 비니에비츠 감독이 목표로 한 것은 테크놀로지 자체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상호작용에 관한 영화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가 “400~500년 후에도 컴퓨터는 내 영화만큼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트리거가 되었다.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를 AI에게 학습시켰고, AI가 창작한 허구의 세계나 캐릭터를 유지한 채 제작진의 큐레이팅을 거쳐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AI는 이 영화를 “놀랍게도 평범한 꿈을 꾸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공장 노동자 도렘 클레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그 진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 〈라쇼몽〉(1950년)처럼 여러 인물들이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카스파라는 이름을 지닌 AI는 자연스럽게 헤어조크 감독의 대표작 〈카스파 하우저의 신비〉(1974년)를 연상시키고, 공장의 기계 이름이 헤어조크라는 점에서 맥거핀의 활용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도렘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없다. 두서 없이 나열된 영화의 챕터는 혼란을 가중시킨다. 급기야 외로운 도렘의 아내가 전자제품(토스터)과 성관계를 갖는 상황에 이르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상 도시 속 인물들의 소외가 강조된 공간 이미지는 헤어조크 영화에서 직접 빌려온 것은 아니다. 실물 크기의 종이 모형을 제작해 촬영하는 토마스 데만트의 사진을 영화의 레퍼런스로 활용했다. 데만트가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세계를 추구하는 것처럼 영화는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을 빚어낸다. AI가 창조한 세계와 현실의 간극을 확인할 즈음, 영화는 태연히 관객에게 논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냐고 질문까지 던진다. 감독은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며 수정을 생각하지만 AI는 허락하지 않고 대본대로 완성할 것을 주장한다. 이렇듯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뒤섞인 형식이지만 보리스 그로이스, 찰스 무데데 등과의 인터뷰에 점점 시선이 쏠리고 AI 시대의 예술의 가치와 윤리 등에 대한 질문으로 무게중심이 서서히 옮겨간다. “이것은 AI 영화가 아니라 에세이 영화”라는 피오트르 감독의 주장대로 〈그를 찾아서〉는 분명 에세이 영화가 지향하는 사유를 추구한다. AI가 변화시킬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한 감독의 고뇌와 진지한 탐색이 담겨 있다
신데렐라 세계관의 바디 호러
〈어글리 시스터〉
그림 형제의 동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계모와 언니들한테 구박 받지만 마침내 백마 탄 왕자와 만나서 인생역전하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향 아래 있음이 분명한 이 영화는 예쁜 ‘신데렐라’ 아그네스 대신 못생긴 의붓언니 엘비라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고전 동화를 뷰티 호러로 완전히 비틀어버린다. 엘비라가 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행하는 광기 어린 다이어트와 성형시술은 인류 역사에서 여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사회적 억압으로 작용해온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는 노골적인 장치다. 신데렐라 세계관의 〈서브스턴스〉랄까. 거침없이 훼손된 신체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바디 호러의 장르적 요건을 탁월하게 충족한다. 원작 동화의 줄거리가 그렇듯, 왕자가 보내온 구두에 맞지 않는 발을 욱여넣기 위해 엘비라가 자신의 발가락을 잘라내는 장면이 결정적이다.
제41회 선댄스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누군가 잔혹한 장면을 버티지 못하고 극장 로비에 구토를 했다는 소문이 노이즈 마케팅으로 작용했을까. 상당수 거장 감독의 초창기가 그렇듯, 에밀리 블리치펠트는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장르영화계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이 영화의 창조주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감독은 회고한다. “(저도) 여성성과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맞추어 살기 위해 애썼고, 너무 못생기거나 너무 남성적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살았죠. 몸과 마음에 큰 부담이 됐어요. 극중 의붓언니에게서 그걸 느꼈어요. 말도 안 되게 작은 신발에 맞추려고 뭐든 하려는 의지 말예요. 우리 중 99.9%는 불가능한 일인데도, 여전히 불가능한 미의 기준에 맞추려고 애쓰고 있죠.”(〈스크립트〉). 아름다움은 고통, 아름다움은 공포. 그러니까 이 메스꺼움은 환상이 아닌 실재다.
악취미 아닌 고전의 발견
〈전기톱 학살의 사슬〉
202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 다큐 영화 수상작인 〈전기톱 학살의 사슬〉은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년)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평론가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 알렉상드르 O. 필립이 〈텍사스 전기톱 학살〉에 깊은 영감을 받은 대가들의 인터뷰를 수집하며 이것이 그저 괴상한 악취미를 자극하는 장르영화로 국한되지 않는 이유를 나열한다.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공포영화 팬임을 자처하는 패튼 오즈월트와 폭력의 미학을 연출하는 대가로 알려진 감독 미이케 다카시, 호주의 평론가이자 작가 니콜라스 헬러, 설명이 필요 없는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 그리고 〈죽여줘! 제니퍼〉 등을 연출한 감독 캐린 쿠사마까지, 다섯 명의 인터뷰이는 〈텍사스 전기톱 학살〉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을 권하고 이 작품이 고전적인 평가를 받는 경위를 기꺼이 설득한다.
패튼 오즈월트는 영화 속 살인마들이 카메라를 훔쳐서 살인이나 고문 장면을 촬영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조롱받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어난 것만 같은 잔혹한 순간을 목도하는 관객의 감상을 유린하는 듯한 독특한 감상을 야기한다는 의미다. 〈샤이닝〉을 집필하던 호텔에서 〈텍사스 전기톱 학살〉을 관람했다는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이 특별한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도 극사실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고 말한다. 기존의 영화들이 제공하지 않았던 진짜 위협감과 맞닥뜨리는 경험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을 보지 않았다면 감독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는 미이케 다카시나 품질이 떨어지는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처음 관람한 탓에 노랗게 변색된 색상으로 현실적인 재난을 떠올리게 됐다는 니콜라스 헬러의 고백도 흥미롭지만 캐린 쿠사마 감독의 통찰은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중요성을 확실히 시사한다. 그는 저렴한 B급영화라는 평판을 가진 이 작품이 다분히 미국적인 가족주의와 남성성에 대한 억압과 억제를 통찰한다며 ‘미국적인 광기’에 대한 영화라고 평가한다.
이 모든 말들은 ‘영화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답변처럼 들린다. 선악으로 간편하게 구별할 수 없는 심리에 몰입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행위가 영화의, 예술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텍사스 전기톱 학살〉이 40여 년 동안 회자되고 영감을 부추기는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이며 〈전기톱 학살의 사슬〉을 기념비적인 영화 다큐멘터리라 평가할 수 있는 근거다.
관음적 시선, 관능적 욕망
〈리플렉션〉
남프랑스 코트다쥐르 해안가의 고급 호텔. 멀끔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존이 호화로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낸다. 존은 1960년대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전설의 스파이. 빼돌린 다이아몬드와 은닉한 돈으로 숙박비를 지불하는 그는 옆방의 묘령의 여인을 주목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자,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환상 세계를 펼쳐내 보인다. 〈리플렉션〉은 〈아메르〉(2009년), 〈더 스트레인지 컬러〉(2013년), 〈시체들을 태우라〉(2017년) 등으로 하위 장르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이어오고 있는 브루노 포르자니, 엘렌 카테의 또 한 번의 공동 연출작이다. 서사의 전형성이나 내러티브의 선형적 전개는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신들만의 화법으로 쾌속 질주한다. 화려하고 과감하고 기이한 몽타주 충돌, 이미지 중첩, 속도감 있는 컷 편집으로 스릴러, 범죄, 미스터리, 고어 등의 다양한 장르의 광풍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지알로 호러와 1960~70년대 유행한 유럽의 스파이물을 적극적으로 오마주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마구잡이로 경계 없이 이어 붙여 콜라주를 이룬다. 마치 이미지의 만화경 속에 빠져버린 듯하달까. 그 속에서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은 무람없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서 어른대던 노신사 존은 어느새 젊은 시절의 잘나가는 스파이 존이 돼 있고, 당시의 존이 부여받은 중요 임무는 노년의 존의 잔상인지, 회상인지, 상상인지 모를 장면과 이어진다. 이탈리아의 베테랑 배우 파비오 테스티가 백발의 존의 중후함을 안성맞춤으로 연기하고, 젊은 시절의 매혹적인 스파이는 벨기에의 야닉 레니에가 멋들어지게 소화한다. 여기에 더해 〈리플렉션〉은 온갖 시각적 쾌감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관음적 시선과 관능적 욕망을 잇기도 하고, 보이는 방식을 둘러싼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은 원형 디스크 조각을 연결해 만든 파코 라반 풍의 드레스에서 착안했을 법한 의상의 등장이다. 디스크 대신 거울 조각들로 만든 이 의상은 그 자체로 화려한 영화적 오브제로 눈길을 끌기도 하고, 거울 하나하나가 영상 녹화 장치라는 설정은 스파이물의 비밀스러운 염탐과 탐문의 방편이 돼준다. 스틸 사진, 만화 이미지, 영화의 속성을 두루, 고루 버무려서 장르, 형식, 매체의 경계를 순식간에 허물고, 이어 붙여내는 마술적 환상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