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에서 2000년 이후 발생한 살인과 실종 등 강력 사건 가운데 범인을 잡지 못한 미제 사건이 14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올해에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또다시 한 해를 넘기게 됐다.
27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충북내에서 2000년 이후 발생해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장기 미제 강력 사건은 총 14건이다.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최소 10년 이상, 최장 2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이 중 사건 해결의 단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2009년 발생한 청주 가경동 여성 피랍 살인 사건과 2004년 영동 주부 살인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용의자의 DNA나 신원이 특정됐지만, 범인 검거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2009년 1월 18일 새벽 6시쯤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의 한 대형 할인점에서 야간 청소 직원으로 일하던 이모(당시 58세)씨가 퇴근 후 귀가하던 중 실종됐다. 이씨는 매일 밤 10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청소 업무를 마친 뒤 마트 안 미화원 대기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5시 50분 마트를 나서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날 평소 시각에 오던 첫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불법 주정차 단속용 폐쇄회로(CCTV)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이씨에게 짙은 색 트라제 XG 차량이 접근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차량은 이씨가 서 있는 지점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정차했고, 남성 운전자가 내려 이씨에게 말을 건넸다. 약 10초간의 대화 뒤 이씨가 조수석에 오르자 차량은 이씨의 집이 있는 모충동 방면으로 사라졌다.
이씨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남성이 운전한 트라제 차량 / KBS
이씨의 휴대전화는 버스 정류장을 떠난 지 17분 뒤 집 근처에서 강제 종료됐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약 4.8km로 이동 시간은 12분 정도였다. 이씨는 실종 13일 뒤인 2월 1일 늦은 오후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 현도교 인근 하천 풀숲에서 머리에 검은 비닐봉지가 씌워진 채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소지품과 신발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발은 깨끗한 상태였다.
부검 결과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시신에서 남성의 DNA가 채취됐지만, 반항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마취제 등 약물 성분도 검출되지 않았고, 다른 범행 도구를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위에서 소화되지 않은 김과 밥이 확인돼 사망 시각은 실종 당일 오전 8시에서 9시 무렵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약 1년 동안 이씨 주변 인물과 동종 범죄 전과자 등 1200여 명의 DNA를 대조했다. 이씨가 일했던 대형마트 남성 종사자 200여 명의 유전자도 채취해 대조했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CCTV 영상 분석 결과 반대 방향으로 주행 중이던 차량이 이씨를 보는 순간 급히 유턴해 버스 정류장 쪽으로 접근한 정황이 확인됐다. 그러나 새벽 시간대라 화질이 좋지 않아 차량 번호판은 특정되지 못했다.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차량 종류가 트라제 XG라는 점뿐이었다.
경찰은 실종 현장 및 시신 발견 장소 인근을 지나거나 청주와 대전 등 인근 지역에 등록된 트라제 XG 차량 약 1만 7300여 대를 조사했다. 이 중 알리바이가 불확실한 약 800여 명의 유전자를 채취해 대조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수사 기록은 2500여 쪽에 달했다.
트라제 동호회 회원들은 CCTV에 포착된 차량 옆면의 크롬 몰딩과 문등, 보조 브레이크등을 분석해 용의 차량이 1999년부터 2002년 초반까지 생산 판매된 트라제 XG 중급 이상 모델이며, LPG 차량일 것으로 추정했다. 법영상분석연구소는 사진 계측 프로그램을 통해 운전자가 174~180cm 키에 보통 체격의 남성이라고 분석했다.
경찰은 이씨 시신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를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 데이터베이스에서 대조군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이 DNA와 일치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찰은 주변인 조사 등 범인 검거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2004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에는 충북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의 한 주택 거실에서 집주인 박모(당시 42세)씨가 머리에 둔기를 맞아 숨져 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며칠간 마을 주민 여러 명을 소환 조사한 경찰은 유일하게 연락이 닿지 않던 주민 최용배(당시 43세)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했다. 최씨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경남 밀양의 지인을 찾아가 자신의 범행을 실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동 주부 살인 사건 용의자 최용배씨.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 따르면 박씨는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리고 다녔으며 그 때문에 빚에 시달렸다. 박씨는 갚을 생각 없이 유흥비 등으로 최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빌린 돈을 흥청망청 썼고, 박씨의 주변 친구들조차 사건 며칠 전 최씨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느냐며 걱정했지만 박씨는 무시했다.
최씨도 박씨가 빌린 돈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거나 집에 찾아갔지만 집이 비어 있거나 전화번호가 매번 바뀌었다. 당시 최씨는 은행으로부터 수차례 변제 독촉을 받는 상황이었다.
최씨는 박씨의 빚(1300만 원) 보증을 섰다가 대신 독촉 전화를 받게 되자 말다툼을 벌이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추적에 나섰으나 최씨는 고속도로에서 극단 선택 시도로 의심되는 추돌 사고를 낸 뒤 경북 김천의 한 병원으로 옮겨진 것을 끝으로 종적을 감췄다.
최씨의 주변 인물들은 시신 발견 전날 술자리에서 만취 상태의 최씨가 박씨를 죽였다고 칼을 꺼내들었지만 친구가 칼을 빼앗아 말리고 진정시켰다고 진술했다. 도주 중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최씨는 병원에서 치료조차 받지 않은 채 도주했고, 공중전화로 친구에게 연락해 “내가 박씨를 죽였다. 나도 죽고 싶은데 죽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신이 발견된 지 41일 만인 2004년 8월 5일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최씨를 지명 수배했다. 최씨는 중요 지명 피의자 종합 공개수배 전단에 2005년 하반기 처음 수배됐고 2016년, 2017년까지 등록됐지만 검거되지 않았다. 3년간 장기 미수배였다가 2021년 하반기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배 전단에 올라오고 있다.
경찰은 공개 수배에도 최씨 행방이 발견되지 않는 점에 미뤄 국외로 밀항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다만 수배 전단의 사진은 사건이 발생한 2004년에 찍은 사진이라 21년이 지나 60대 중반이 된 최씨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3년 발생한 보은 콩나물밥 농약 사건도 대표적인 미제 사건이다. 2013년 2월 20일 오후 7시 30분경 보은군 보은읍 한 음식점에서 식사하던 업주와 마을 주민 6명이 갑자기 구토와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보건소로 긴급 이송됐다.
이후 치료를 받던 정모(당시 70세)씨가 5일 만에 숨지고, 콩나물밥의 양념간장에서 원예용 살충제인 메소밀이 발견되면서 강력 사건으로 전환됐다. 콩나물밥을 함께 만들어 먹은 식당 주인과 종업원 등이 의식을 회복하면 사건 전모를 쉽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의식을 회복한 이들이 조리 과정을 포함한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경찰 수사는 미궁 속에 빠졌다.
이 밖에 옥천 40대 여성 실종 사건(2000년), 영동 여고생 살인 사건(2001년), 진천 초등생 실종 사건(2002년), 청원군 부부 살인 사건(2004년), 영동 노부부 살인 사건(2005년) 등도 미제 목록에 올라 있다.
장기 미제 강력 사건 중 가장 최근에 해결된 것은 제천 토막 살인 사건(2003년)이다. 2018년 6월 강원 속초시의 원룸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지병으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최근 과학수사 기법이 날로 진화하면서 타 지역에서 장기 미제 사건이 잇따라 해결되고 있는 만큼 충북 미제 사건 역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충북경찰청 관계자는 “형사기동대 미제 전담 수사반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피해자와 가족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살인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경찰은 청주 가경동 사건과 영동 주부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 제공을 당부하고 있다. 제보는 충북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수사전담팀 또는 영동경찰서 수사과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