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그룹(옛 현대중공업)의 사장단 인사에서 정기선(43) 수석부회장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하며, 한국 재계 8위 그룹의 ‘오너 3세 경영’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올렸다. 이는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준(73)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회장이 그룹에 입사한 지 16년 만에 그룹 총수에 오른 것이다. 특히 오너인 정기선 회장의 등장은 HD현대그룹은 약 37년간 유지되어 온 전문경영인 체제를 종식시키는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이번 승진은 단순한 세대교체를 넘어, HD현대 그룹을 제조업 중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HD현대 2.0’ 시대를 열겠다는 강력한 신호탄으로 평가된다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권오갑 회장 등 전문경영인 체제 종식
창업자인 고 정주영 손자 전면에 등장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여섯째 아들이자 전 국회의원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회장은 1982년 5월 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출생한, 대한민국 국적의 하동 정씨 가문이다. 그는 대일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를 취득하고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아버지인 정몽준 이사장은 서울대 ROTC 출신으로 역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수여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귀국 전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한 경력이다. 이러한 경력은 정기선 회장의 경영 방식이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의 생산 효율성 최적화보다는 전략적 기획, 금융 공학, 그리고 데이터 기반의 포트폴리오 재편에 중점을 둔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는 입사 후 불황기를 겪으며 그룹의 체질 개선과 신사업 발굴에 집중했는데, 이는 컨설팅 기업 경험에서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그룹 운영에 깊숙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러한 배경은 HD현대그룹이 전통적인 중공업 이미지를 벗고 투자 지주회사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HD현대’로의 사명 변경 전략 과도 연결된다.
정기선 회장은 2009년 현대중공업 기획실 재무팀을 시작으로 HD현대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그의 승진 경로는 매우 빠르고 체계적이었다. 2013년 현대중공업 수석 부장, 2014년 상무, 2016년 전무, 2018년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는 HD현대 경영지원실장, HD현대중공업 선박영업 대표, HD현대마린솔루션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현장 경험과 전략 기획 업무를 두루 섭렵했다. 2021년에는 현대중공업지주(現 HD현대)와 HD한국조선해양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되었고, 2022년 HD현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2024년 부회장 취임을 거쳐, 2025년 HD현대 대표이사 회장으로 최종 승진하며 그룹 총수직에 올랐다. 이처럼 16년간 현장과 전략을 오가며 쌓은 경험은 조선업 불황의 한가운데서 체질 개선과 신사업 발굴을 주도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그의 경영철학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앞서 HD현대그룹은 2017년을 기점으로 현대중공업지주(現 HD현대)를 중심으로 지주사 체제 구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現 HD한국조선해양), 현대건설기계(現 HD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現 HD현대일렉트릭) 등 4개 기업으로 분할댔다.
정기선 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이 지주사 체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2018년 3월 현대중공업지주(現 HD현대)의 지분 6.1%를 확보하며 단숨에 그룹의 3대 주주로 등극하며 승계 작업의 궤도에 올랐다. 현재 HD현대 그룹의 최대 주주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으로, 보유 지분은 26.6%다. 참고로 2대주주는 국민연금공단으로 7.3%다.
향후 정기선 회장은 HD현대지주로부터 받는 배당금을 아버지인 정몽준 최대 주주의 지분을 물려받기 위한 인수자금으로 활용할 것으로 분석된다.
권오갑 회장 명예회장 추대
37년 전문경영인 체제 종식
올해 사장단 인사는 정기선 회장의 승진과 함께 권오갑 회장의 명예회장 추대 및 사임이 맞물리면서 37년 만에 전문경영인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번 인사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의미는 정기선 회장이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에 대한 공동 대표이사직을 겸임하며 책임 경영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정기선 회장은 그룹 지주사(HD현대) 및 조선 부문 중간 지주사(HD한국조선해양)의 공동 대표를 맡는 것에 더하여, 건설기계 부문의 중간 지주사인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공동 대표까지 맡게 됐다. 조선 부문이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과 달리, 건설기계 부문은 계열사(HD건설기계 및 HD현대인프라코어) 간 합병을 앞두고 있어 조직 통합 및 실적 개선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같이 정기선 회장의 겸직은 그룹의 3대 포트폴리오 축(조선, 건설기계, 에너지) 중 상대적으로 취약한 고리에 오너 리더십을 직접 투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통합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그룹 포트폴리오 재편의 완성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위기 대응 리더십’을 보여주는 행보로 해석된다. 그룹의 미래 성패는 결국 이 건설기계 부문의 성공적인 통합과 턴어라운드에 달려 있으며, 정 회장은 이를 위해 최전선에 나선다는 의미다.
정기선 회장 주도로 사명을 변경
제조업 아닌 투자 지주회사 의미
정기선 회장 체제는 그룹의 상징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당초 현대중공업지주에서 정기선 회장이 주도해 ‘HD현대’로 사명을 변경한 것은 제조업 중심의 이미지를 벗어나 투자 지주회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새로운 사명 ‘HD현대’에서 ‘HD’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Human Dynamics)’로 ‘인류의 꿈(Human Dreams)’을 실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고(故) 정주영 선대 회장이 강조했던 인류애(Humanity)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미래 기술과 혁신을 통해 인류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정기선 회장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룹의 공식 미션은 “시대를 이끄는 혁신과 끊임없는 도전으로 인류의 미래를 개척한다”이며, 핵심 가치는 ‘세상을 이끄는 혁신’, ‘두려움 없는 도전’, ‘서로에 대한 존중’, ‘모두를 위한 안전’이다.
이러한 브랜딩 전략은 단순한 기업 이미지 변신을 넘어선 깊은 전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기선 회장이 추진하는 혁신의 핵심은 AI, 디지털, 로봇 등 첨단 기술이다. HD현대는 이러한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해야 하는데, 전통적인 ‘중공업 회사’보다는 ‘미래 기술 회사’라는 이미지가 첨단 기술 인재(AI 개발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유치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사명 변경과 ‘Human Dynamics’ 강조는 미래 핵심 기술 인재 확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시장으로부터 첨단 기술 기반의 지주회사로서 더 높은 기업 가치를 평가받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이는 제조 자산의 규모보다는 기술 투자 및 혁신 속도를 그룹의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겠다는 정기선 회장 체제의 강력한 의지다.
특히 HD현대는 정기선 회장의 주도 아래 해상과 육상을 아우르는 디지털 대전환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전략은 조선, 건설기계 등 그룹의 핵심 사업 포트폴리오 전반에 적용된다.
‘자율운항 선박 시장’ 선도 의욕
HD현대의 해상 혁신은 자회사 아비커스(Avikus)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기선 회장은 자율운항 선박 시장에서 선도기업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HD현대그룹은 아비커스에 총 570억 원을 투자했으며, 아비커스가 개발한 대형 선박용 ‘하이나스 솔루션(HiNAS Solution)’은 이미 20척에 적용되어 운항 중이다. 이는 265조 원 규모로 예상되는 자율운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다.
아비커스는 지난 3월 9,334km 길이의 항로 자율운항 실증을 통해 최대 15%에 이르는 연료 절감 효과를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 이는 자율운항 기술이 선박의 안전성 확보뿐만 아니라 해운사의 운영 효율성 및 경제성을 극대화하는 핵심 기술임을 증명하며, HD현대를 단순한 선박 건조사를 넘어 고부가가치 기술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정기선 회장의 경영철학은?
정기선 회장은 조선업 불황기(2010년대 중반)에 그룹의 체질 개선을 주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업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경영 철학을 확립했다. 이는 조선(해양), 건설기계(육상), 에너지로 구성된 3대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으며,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現 HD현대인프라코어) 인수를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하여 건설기계 부문을 그룹의 핵심 축으로 키워낸 배경이었다.
또 정기선 회장은 “AI와 디지털, 로봇 등의 첨단 기술이 더해진 HD현대의 사이트(Xite·육상) 혁신은 건설 현장과 장비의 개선을 넘어 인류가 미래를 건설하는 근원적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기선 회장의 리스크 요인
정기선 회장의 가장 시급한 리스크는 건설기계 부문의 통합 및 턴어라운드다. 정기선 회장이 직접 공동 대표를 맡은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실적 개선과, 대규모 계열사 합병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조직 문화의 통합 및 안정화는 그룹의 전체 포트폴리오 안정성을 결정지을 핵심 과제다. 또한 자율운항 등 미래 기술에 대한 막대한 R&D 투자가 단기적인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수익 창출로 빠르게 전환되어야 하는 압박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