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한미 무역협상(관세협상)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대미 투자 구성·방식과 한미 통화 스와프 등 외환시장 안전장치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 일정 부분 좁혀진 듯한 신호가 잇따르면서 이달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전에 타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통화스와프 체결과 관련해 긍정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이날 열흘 내로 한미 무역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 가운데 정부에서는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 대미 경제·통상 라인이 총출동해 협상 막바지 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베선트 “무역협상 곧 마무리” “내가 연준 의장이면 통화스와프”
한미는 지난 7월 30일 타결한 관세협상에서 미국이 예고한 대(對)한국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이 총 3천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시행하는 등의 내용에 합의했지만, 대미 투자의 이행 방안을 놓고 이견을 보여왔다.
한국은 3천500억달러 중 직접 현금을 내놓는 지분 투자(equity)는 5% 정도로 하고 대부분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credit guarantees)으로 하되 나머지 일부를 대출(loans)로 채우려는 구상이었지만, 미국은 앞서 일본과 합의처럼 ‘투자 백지수표’를 요구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 합리적 수준의 직접 투자 비중 ▲ ‘상업적 합리성’ 차원에서의 투자처 선정 관여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15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 DC 재무부에서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과 관련한 이견이 해소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연합뉴스 특파원의 질문에 “난 이견들이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답했다.
베선트 장관은 “우리는 현재 대화하고 있으며, 난 향후 10일 내로 무엇인가를 예상한다”고 밝혔다. ‘무엇인가’는 한미간 무역협상의 결과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CNBC방송 대담에서도 ‘현재 어떤 무역 협상에 가장 집중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한국과 마무리하려는 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우리는 디테일을 해결하고 있다”고 답했다.
베선트 장관은 ‘디테일’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한미 간 주요 쟁점으로 꼽혔던 3천500억달러 대미 투자 패키지의 구성 및 방식과 대규모 달러화 조달에 따른 외환시장 안전장치인 ‘한미간 통화스와프’ 등 세부 사항에서 의견이 접근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미간 통화스와프 체결 가능성에 대한 연합뉴스 특파원의 질의에 베선트 장관은 “재무부가 통화 스와프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건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소관”이라면서도 “내가 연준 의장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의장이라면 한국은 이미 싱가포르처럼 통화 스와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구윤철 “협상 빠른 속도 조율…우리 제안 받아들일듯”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15일 한미간 관세 협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정부가 요구해온 통화스와프 체결에 대해 미국 측이 공감대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워싱턴DC 인근 덜레스국제공항으로 입국한 구 부총리는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를 할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며 “지금은 아주 빠른 속도로 (관세협상을) 서로 조율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구 부총리는 3천500억달러 투자 패키지 구성에 대해 “(미국과) 계속 협의 중에 있다”면서 “베선트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이야기해서 (그들이) 이해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우리나라 외환시장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며 “그래서 아마 저희가 제안한 것에 대해 받아들일 것 같다”고 예상했다.
결국 베선트 장관의 언급대로 세부 사항에서 이견을 좁히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2개월 반 동안 이어진 후속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가능하다.
아울러 미국이 요구해온 전액 현금 투자에 대해서는 “일단 저희들은 (입장을) 설명했다. 베선트 장관과 러트닉 장관에게 설명해 이해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정 규모의 한미간 통화 스와프 또는 그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외환시장 안전장치에 양국이 합의할 가능성이 주목된다.
다만, 베선트 장관이 거론한 미국과 싱가포르의 통화 스와프는 600억달러 규모라는 점에서 한국이 애초 희망한 무제한 통화 스와프와는 차이가 있다.
한편 구 부총리는 이날부터 워싱턴DC에서 열리는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를 위해 미국을 찾았으나, 이 기간 베선트 장관을 만나 관세 협상 논의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용범·김정관 출국 “긍정적…오해 간극 많이 좁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16일 한미 관세협상 후속 논의를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 실장은 이날 출국에 앞서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에게 “지금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 총회로 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다 모이는 기간이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의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준비하기도 적절하다”며 “여러 갈래로 이뤄지는 논의를 한 자리에 모아 서로 입장을 조율하고 협상에 박차를 가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같이 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김정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각각 협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협상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이전에는 미국 내 관련 부서들이 긴밀하게 소통하는 인상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엔 미국도 재무부와 USTR, 상무부가 긴밀히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김 장관은 한미 통화스와프 등 협상 쟁점과 관련해 “외환시장과 관련된 여러 부분에서 미국 측과 상당 부분 오해, 격차, 이해의 간극이 많이 좁혀졌다는 정도 말씀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미투자금 3천500억 달러 선불 합의’를 또 거론한 데 대해서는 “외국 정상이 한 발언에 토를 다는 건 적절치 않다”면서도 “다만 여러 내용을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APEC 정상회의에 맞춰 관세협상의 최종 타결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두 정상이 만나는 기회이기에 양국 협상단 간에 이를 활용하자는 공감대는 있다”면서도 “다만 우리 국익과 국민의 이해에 맞게끔 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협상 막바지에 “韓 3500억달러 선불 합의” 또 주장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 한국이 약속한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를 ‘선불’ 형태로 미국에 투자할 것이라고 재차 언급해 눈길을 끈다. 협상 막바지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발언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범죄 단속 성과 발표 행사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6500억 달러를 받는 위대한 거래를 만들었다. (무역수지의) 균형을 맞췄다”면서 “알아두셔야 할 것은 일본과 한국 모두 (무역 합의에) 서명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니까 한국은 3500억 달러를 선불(up front) 형태로 (투자한다), 일본은 6500억 달러다. 모두 이에 동의했다”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대미 투자 금액은 5500억 달러인데 트럼프가 액수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국은 지난 7월 30일 미국과의 구두 합의 수준 무역 합의에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지만, 자금 집행 방식에 있어서는 양국 간 견해차가 커 아직 문서화와 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트럼프는 지난달 25일에도 “일본은 5500억 달러, 한국으로부터는 3500억 달러를 받는다. 이는 선불”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