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에 담긴 비극과 희극” 수원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시리뷰]

“사진첩에 담긴 비극과 희극” 수원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시리뷰]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경. 전시의 출발점이자 작가의 유일한 유품인 사진첩(가운데)의 영인본이 마련돼 있다. 이나경기자

 

“사실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다워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명대사인 이 말에는 누군가에겐 안타까움, 불편함으로 느껴졌을 ‘비’가 사실은 그 도시의 진정한 정체성이자 매력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파리를 여행하던 주인공은 1920년, 1890년대로 우연히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동경하던 예술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살바도르 달리 등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동경해 마지 않던 예술가들과, 예술의 황금기로 상상하던 시간대에 당도하지만 그곳 역시 지금의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드러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시대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은 반대로 평범해 보이거나 비극적인 일상이 희극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이자 철학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예술인 나혜석(1896~1948)의 유일한 유품이던 사진첩을 중심으로 우리를 그녀의 생애로 안내한다. 전시는 관람객을 격동의 시대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나혜석을 매개로 박수근, 이응노, 천경자 등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13인의 작품 55점도 함께한다.

 

한 사람이자, 예술가의 생애를 뒤따라 가며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와 그녀가 만났던 사람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파헤치다 보면 나혜석의 삶이 마냥 비극적이지도, 화려하게 빛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기쁨과 환희, 비극과 슬픔, 평범함과 독특함이 공존했던 삶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사진첩에서 채 해독되지 못한 공백의 순간들은 미완으로 남아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이 채워나갈 몫으로 남아있다.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이란 제목엔 정지 상태로 머무르는 나혜석의 삶 속 소중한 순간들과 그곳을 유영하는 감정들이 담겨있다.

 

전시의 출발점이자 작가의 유일한 유품인 사진첩(가운데)을 영인본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나경기자

 

전시는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유족의 기증품이자 전시의 출발점인 사진첩이 놓여있다. 1부 ‘한 예술가의 사진첩’은 나혜석이 노년에 제작한 사진첩과 101점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사진첩은 나혜석이 직접 선택하고 배열해 제작한 것으로 전시에선 사진첩이 전면 공개, 사진에 관해 그녀가 남긴 자필 설명도 함께 기재돼 있다. 심하게 흔들린 필체는 그녀의 수전증을 드러내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노쇠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유추하게 만든다.

 

사진은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명확한 범주도 없다. 이는 노년의 그녀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했던 흔적이라 짐작케 한다. 전시의 구성 역시 그녀의 사진첩에 배열된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사진첩을 만들었을 나혜석의 순간을 뒤따라 간다. 주요 촬영 시기는 남편이던 김우영의 유학 시기부터 나혜석이 해인사에 머물던 1930년까지 분포된다. 사진의 대부분은 가족과 관련돼 있는데, ‘나의 가족’이란 사진에 담겨 있는 그녀의 자녀들은 평생을 그리워했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마냥 자유로이 혼자의 몸으로 유랑했을 것 같은 나혜석의 자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랑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사진첩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진이 촬영됐을 맥락을 해석하는 과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 나혜석 부부가 도움을 줬던 의열단원 이현준의 얼굴, 영친왕 부부에 관한 나혜석의 스크랩 자료, 동경했던 프랑스 시기의 모습 등이다. 상당한 고화질로 촬영된 사진은 들여다볼수록 인물들의 얼굴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1부에는 최근 2년간 진행됐던 사진첩의 상태 조사, 보존처리, 영인본 제작, 기초 해제 연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상물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시를 담당한 이채영 학예사는 “처음 사진첩을 기증 받았을 땐 겉표지와 속지 등이 모두 분리돼 있었고,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며 “이를 해제하는 과정과 함께 사진 속에 나온 인물들과 서사를 해석하는 과정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고 설명했다.

 

나혜석과 그녀의 자녀들이 촬영된 사진. 큰 딸 김나열, 아들 김선과 김건, 일찍이 세상을 떠난 막내의 모습이 담겨있다.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2부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으로부터’는 ‘가족’을 중심으로 박수근, 배운성, 이중섭 등 근현대 작가들의 가족에 얽힌 작품들을 소개한다.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에 가족은 이들에게 창작의 출발점이자 영원한 지지자이자, 동시에 상실과 그리움의 대상이며 가족의 복원은 고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임군홍의 ‘가족’(1950)은 6.25전쟁 발발 보름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으로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쟁이란 비극사로 운명이 흔들린 임군홍의 생애는 남다른 여운을 남긴다.

 

그런가하면 수원 출신인 백영수가 프랑스 체류 시기에 제작한 연작 ‘모성의 나무’(1998)은 그의 일평생 주제였던 ‘가족’과 ‘이동’의 이야기가 녹아나 있다. 밀착한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은 한없는 사랑이자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을 담았다. 피란길 마주했던 힘없는 어느 아이의 모습에서 착안해 고개가 90도 기울여진 모자상은 그의 작품 특성이기도 하다.

 

임군홍作 ‘가족’(1950). 6.25전쟁 발발 보름 전 시작된 그림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소장,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백영수作, ‘모자’(1985).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그의 오랜 주제였다.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3부 ‘여정의 어딘가에서’는 나혜석의 여정 속에 등장한 장소들을 매개로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했던 배운성, 백남순, 이종우, 서진달, 이응노 등 인물들을 조명한다. 사진첩에 등장한 다양한 장소는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이자 동경의 대상이자 창작의 동력이었다.

 

1927년 김우영과 함께 떠났던 세계 여행은 당시 많은 미술가들이 꿈꾸던 세계 예술의 중심인 파리를 포함했는데, 나혜석은 유럽에서 유학하던 이들과 교류하며 서양미술의 정수를 경험하고, 동시에 서양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했다. 찬란했던 세계일주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외면했던 시기 전국 명승과 사찰을 돌아다니며 연을 맺었던 서진달, 이응노 등의 모습은 사진첩 속에도 남아있으며 이들의 대표작도 만나볼 수 있다.

 

마지막 4부 ‘나를 잊지 않는 행복’은 나혜석의 삶에서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여행’을 키워드로 전시를 마무리한다. 여행이란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자유를 체험하는 동시에 축적된 지식을 외부의 경험과 나누는 과정이었다. 나혜석을 비롯해 박래현, 천경자는 식민지 시대 드물게 일본에서 유학한 여성 미술가였다. 여행지의 경험은 창작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드넓은 세계와 여류화가가 마주한 사회적 한계, 가족사에 얽힌 비극 등 천경자의 삶은 특히 나혜석과 매우 닮아있다. 전시는 여행이 이들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행복을 향해 나선 길이었음을 드러낸다.

 

박래현作, ‘작품 16’(1968).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고대문명에 감화되거나 이국적인 소재는 작품에 실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나문화재단 소장,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그룹 몬스타엑스(MONSTA X)의 민혁이 작품을 직접 소개하는 오디오가이드가 운영되며 전시장 QR코드를 스캔해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민혁은 2023년 성수동 개인전 등 전시를 개최한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남기민 수원시립미술관 관장은 “미술관 소장 자원을 매개로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자, 여러 소장처의 협조로 개최될 수 있던 전시”라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행궁에서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11일까지.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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