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현지시간 23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80차 유엔총회에서 ‘END 이니셔티브’ 구상을 소개했다.
이날 7번째 순서로 기조연설에 나선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END 이니셔티브’로 한반도 냉전을 끝내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ND’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sation), 비핵화(Denuclearisation)의 약자다.
END의 첫 단계인 ‘교류’에 대해 그는 “교류와 협력이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굴곡진 남북 관계의 역사가 증명한 불변의 교훈”이라며 교류 협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또한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남북의 관계 발전을 추가하면서 북미 사이를 비롯한 (북한과) 국제사회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지지하고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단계인 ‘비핵화’에 관해 이 대통령은 “엄중한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도 밝혔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END 이니셔티브’에 대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교류, 관계정상화, 비핵화 세 요소는 서로 추동하는 구조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추진하면서도 각 단계가 선후관계가 아닌, 한 가지의 요소가 다른 요소의 진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율해가며 관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위 실장은 또 “이 원칙들은 과거 남북 간의 합의나 2018년 채택된 북미 싱가포르 성명 등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고도 덧붙였다.
주요 발언은?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기조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하고 유엔 가치를 재확인했다.
그는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언급하며 “지난 겨울, 내란의 어둠에 맞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뤄낸 ‘빛의 혁명’은 유엔 정신의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 역사적 현장이었다”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을 함께할 모든 이들에게 ‘빛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새로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완전히 복귀했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고도 덧붙였다.
이 대통령이 방점을 둔 또 다른 부분은 다자주의적 접근과 글로벌 협력이었다.
그는 “같은 문제를 겪는 모든 국가가 이곳 유엔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는 ‘다자주의적 협력’을 이어 나갈 때, 우리 모두 평화와 번영의 밝은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발전하는 인공지능과 과학기술의 활용법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AI 시대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닌다면 인권 침해와 불평등 심화라는 디스토피아를 맞게 될 것”이지만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면 혁신과 민주주의 강화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발전된 기술과 디지털 혁신을 통해 국제사회의 기후 위기 대응에 동참하겠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이 대통령은 연설 종료 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접견해 “(남북이) 갈등과 대립을 넘어 대화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엔이 지원해달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실은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현명한 접근”이라고 평가하고 유엔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은 또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추진하는 유엔 개혁에 지지를 표하고 유엔이 효율적인 기구로 발전하도록 한국도 역할을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과도 회담을 했다.
과거 대통령들의 연설 어땠나
이재명 대통령의 기조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대한민국'(33회)이었다. 평화(25회), 민주주의(12회)가 그 뒤를 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동안 총 두 번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했다.
2022년 제77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윤 전 대통령은 북한에 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북한이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아닌 ‘자유’와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접근했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지는 않았으나,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디지털 격차 해소, 기후변화, 공적개발원조 등을 언급하며 자유와 국제 규범 체계의 지지에 방점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한반도 맥락을 제외시킨 글로벌 가치 담론이 주를 이룬 이 연설에서 ‘자유’는 총 21번이 등장했다. ‘국제사회’는 13번, ‘연대’는 8번 언급됐다.
한반도 평화가 세계 각국 정상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이자, 요구하는 핵심 사안인만큼 역대 대통령들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이 빠짐없이 등장해왔던 점을 고려하면 윤 전 대통령의 2022년 유엔총회 연설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동안 북한 대표부는 자리를 비워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전세계 지도자들에게 알린 장면 중 하나였다.
이듬해 열린 제78차 유엔총회의 윤 전 대통령 연설에는 북한이 등장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북한을 “대한민국과 전세계 평화에 대한 직접적,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 문제까지 연결지으며 북한을 강하게 비판했다.
북한을 안보 위협으로 강조하면서, 제재와 압박의 대상이자 동맹과의 공조로 대응해야하는 대상으로 접근한 것이다.
상호존중, 흡수통일 반대, 단계적 비핵화 등 대화와 신뢰 회복을 통한 평화적 해법을 강조하며 ‘END 이니셔티브’를 제시한 이 대통령의 입장과는 반대다.
이보다 더 이전인 2021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제76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유엔(27회)’과 ‘평화(17회)’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종전선언’을 국제사회에 공식 제안하며 남북미 3자 혹은 4자 회담을 통한 전쟁의 법적 종료를 강조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이 대통령과 같은 듯 하나, 문 전 대통령은 제도적·외교적 합의로 굳히려고 했다는 점에서 실질적 교류를 강조한 이 대통령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런가하면 2017년 제72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문 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드러내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요구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6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말할 수 없는 실망과 분노를 안겼다”며 유엔 안보리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내용으로 대북제재를 결의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는 약 20분이 소요됐다. 윤 전 대통령이 지난 2022년에 11분, 2023년에 15분씩 걸렸던 것에 비해선 약간 긴 편이나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22분과는 비슷한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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