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동기 부여 영상에서 ‘그냥’이라는 단어를 자주 본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마주하는 ‘왜?’라는 물음에 “그냥 한다”는 답은 마법의 문장이다. 좋든 싫든 일단 한다, 그냥 한다.
한때, 어쩌면 지금도 청년들에게 유효한 명언으로 여겨지는 “그냥 한다” 말 속에는 모호하지만 함축적인 감정이 있다. 듣는 시선에 따라 체념 또는 무기력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능동적인 결단’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하지만 일각은 그런 청년의 단순한 답변이 못마땅한 듯, 왜 그렇게 무기력하냐고 나무란다. 뭐가 그렇게 외롭고 우울하냐고 묻거나 유난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언젠가 ‘요즘 애들은 너무 약하다’는 한 어른의 평가를 듣고,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동, 관계, 의식주 등 둘러싼 모든 것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불확실한 사회’ 속 약한 존재에게 젊음을 대가로 용기를 박탈해 가는 느낌이 든다.
고르고 골라 답변한 “그냥”이라는 말에 합리적인 부연 설명을 강요하는 시선. 진정으로 맥락이 궁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되물음에, 그 함축적인 “그냥”조차 허용되지 않는 우리에게 매 순간 그럴듯한 목적과 이유를 반드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거 같은 압박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춤을 추세요>(이서수 지음)는 각자의 삶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청년 여성의 모습을 8편의 단편 소설로 엮었다. 서로 다른 고난에 처해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노동자라는 정체성, 부양자라는 정체성. 나와의 관계도 어렵고, 밥벌이에서의 관계도 어렵고, 가족 간의 관계는 더 어려운 인물들의 고군분투는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다.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지성과 감각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시대”라고 소리치는 <운동장 바라보기>의 나, “나를 ‘돈돈’ 거리게 만드는 건 부양자라는 정체성”이라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무심코 피부양자 시절을 잊고 살았더라는 <AKA 신숙자>의 나, 욕망 없는 청년의 생존 방법이 된 ‘미식’을 향해 “무한하고 열렬한 욕망을 품고” 있는 <미식 생활>의 나, 퇴사 후 하고 싶은 일로 ‘진심으로 웃기’를 적고, 퇴사 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일타쌍피”를 말하는 <이어달리기>의 나.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삶은 치열하지만 동시에 공허한 시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각자의 삶을 직시하고, 의무감과 책임감을 되새기는 이들. 작가는 인물 각각의 불안함과 외로움, 요동치는 감정을 어느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고, 허투루 단정하지 않았다. 단순화하지 않았고, 체념하지 않았다.
“바닥에 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걸 보니 알루미늄 수출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껌을 포장하는 데 알루미늄포일만큼 좋은 것도 없다. 껌이 수분을 적절하게 보존해 주고, 여름엔 열을 밖으로 내보내 껌이 녹는 것을 방지해준다. 버릴 땐 작게 뭉쳐서 버릴 수 있으니 편리하기까지 하다. 얇은 종이에 그렇게 많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광합성 런치> 중
상대적으로 더 약한 고리에 위치한 약자를 보며 차별을 발화하는 부분도 있다. 때로는 기득권을 흉보면서, 기득권을 선망하기도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는 “우리의 무지를 흔쾌히 가려주기에.” 이때 사회의 모순된 모습이 함께 고발되며 고립된 일부를 꺼내 온다. “서울 무지렁이”의 고찰과 함께.
예를 들면 “나는 결혼 이주 여성이라는 단어가 싫습니다. 차라리 나를 개척자라고 불러주세요. 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한국은 내가 어머니가 되길 바라지만 나는 그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운동장 바라보기> 속 이주여성 김희서의 목소리에 정곡을 찔렸다.
<그래도 춤을 추세요>는 각박한 세상 안에서 어떻게든 ‘좋은 리듬’을 유지하고, 그 안에 나를 위치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작가는 억눌린 마음을 풀어내도록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멋들어진 움직임이 아니어도, “테크닉보다 진심이 중요” 하기에 낙관의 스텝을 밟도록 권유한다. 잘 추려고 꾸미지 않아도 된다. 무대를 힘껏 밟고 자유로운 몸짓으로 응어리를 풀어내면 된다.
“웰컴, 저와 함께 춤을 추면 세상만사 고단한 일이 다 사라집니다. 나는 이모의 춤사위에 그런 메시지를 읽었다”는 <춤은 영원하다>의 나는 할머니·이모·엄마의 춤, 그러니까 “유전자에 흐르는 막춤”을 보며 “춤은 영원하다”고 되새긴다. “과육만 먹고 씨는 툭 뱉어내며 자란 삐딱한 나와 그런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준 여자들.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 또다시 막춤의 우주가 열렸다.”
작가는 어떤 약자의 이야기도 타자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감정에 굳이 이유를 따져 묻지 않는다. 설명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제각각을 감각하고 긍정하며, 가능성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독자는 인물들이 느끼는 발버둥의 순간에 에너지를 빼앗기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얻는다. 아마도 억눌림을 공유하는 속에서 진짜 감각이 살아났기 때문일 거다. 작가는 ‘함께 춤을 추자’고 한다. 그게 꼭 특별한 움직임이 아니어도 일상적인 동작에서, 글로, 말로, 시선으로 연대할 수 있다. “몸을 흔들 때 세상도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작가는 “혼자 춤을 출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춤출 때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함께 추는 춤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