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 그가 패션계에 가져온 혁명은?

‘스타일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 그가 패션계에 가져온 혁명은?

패션계의 거장 조르지오 아르마니(91)가 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코코 샤넬 이후 사람들의 옷 입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첫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엄격한 전통과 양식이 지배하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에 태어난 그는 점차 유연해지던 20세기 후반 사회 분위기 속 그 변화를 가능케 한 작품을 선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르마니는 정장을 재창조한 인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남성 정장에는 여성적인 감각을 더하였으며, 여성 사이에서는 정장을 대중화시켰다.

아르마니는 이전까지의 딱딱하고 경직된 스타일을 걷어내고, 남성에게는 세련미를, 여성에게는 직장에서의 강한 힘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제시했다.

언론으로부터 “최초의 포스트모던 디자이너”라고 칭송받던 그는 여러모로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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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는 1934년 7월 11일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이 중산층으로서 누리던 안온했던 삶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었다.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굶주림이었다.

어릴 적에는 거리에 버려진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폭발 사고를 겪기도 했다. 아르마니는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친한 친구 한 명은 결국 숨졌다.

이후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쟁”이란, “내게 모든 게 화려하기만 하진 않다는 걸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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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자택에서 촬영된 아르마니의 사진

청년 시절 아르마니는 방황했다.

1956년 의학 학위 공부를 시작했으나, 3년 만에 중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군대 생활에도 금세 싫증이 난 그는 밀라노의 ‘라 리나센테’ 백화점에서 쇼윈도 장식 담당자로 일하게 되었고, 빠르게 승진해나갔다.

디자이너 대부분이 견습생으로 일하거나 패션 학교에 다니며 기술을 배우지만, 아르마니는 매장 현장에서 직접 배우며 실력을 쌓았다.

그는 고객이 좋아하는 원단은 무엇인지 파악한 뒤 직접 직물 공장을 찾아 구매했다. 그렇게 옷감과 직물 구조의 전문가가 되어 이 지식을 활용해 재단 기술을 연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마니는 유명한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니노 세루티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불과 몇 달 만에 세루티는 그에게 자신의 회사 운영 방식을 바꾸어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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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아르마니(왼쪽)와 동네 친구들의 모습

1960년대 중산층 인사들은 오트 쿠튀르(최상급의 맞춤복)는 감당할 수 없었으나, 자신들만의 세련되고 독특한 스타일을 갈망했다.

그리고 원단 전문가였던 아르마니는 그 해답을 제시했다. 고급 원단을 기반으로 깔끔하면서도 정교한 실루엣의 남성복을 한꺼번에 여러 벌 생산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탈리아 특유의 스타일은 곧 유행에 민감한 이들의 패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1966년 아르마니는 당시 젊은 견습생이던 건축가 세르지오 갈레오티를 만나게 된다. 갈레오티는 자신의 커리어도 버린 채 연인의 곁에서 일하길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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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는 밀라노 백화점의 쇼윈도 장식 담당자로 일하게 되며 패션 디자인에 발을 디뎠다

아르마니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갈레오티는 아르마니에게 직접 회사를 차리길 권유했다.

갈레오티는 회사의 비즈니스적인 면을 총괄하였는데, 창업 자금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폭스바겐 자동차까지 팔았다.

아르마니와 갈레오티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이들이 처음 구한 사무실은 너무나도 허름해서 아르마니가 원단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램프 갓을 벗겨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곧 패션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반적으로 아르마니는 남성복은 부드럽게, 여성복은 강하게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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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변하던 시기, 아르마니는 기회를 포착한다

그의 손에서 남성 정장은 더 부드러워지고 관능적으로 변했다. 이는 1960년대 남성들의 달라진 자아상을 반영한 결과였으나, 당시 패션계에서는 아직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울러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아르마니는 그 속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생전 그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방식으로 옷을 입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면서 “직장에서 품위를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아르마니가 우아하게 재단한 정장은 당시 여성들에게 어머니 세대가 일터에서 입던 딱딱하고 답답한 드레스를 대신할 대안이 되어 주었다.

여성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평등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의복이었다.

1978년, 아르마니사는 의류 제조사인 ‘GFT’와 계약을 체결하여 고급 기성복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아르마니는 마케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개봉한 영화 ‘아메리카 지골로’에 출연하는 배우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리처드 기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고 환상적인 모습을 뽐냈다.

할리우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아르마니의 비전이 전 세계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홍보 효과였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참석하는 스타들의 의상과 수많은 영화 및 드라마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87년 작 영화 ‘언터처블’, 1980년대 범죄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이다.

그렇게 10년 만에 그는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유럽 디자이너가 되었고, 이와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 또한 프랑스 파리에 버금가는 글로벌 패션계의 중요한 상업적, 창조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아르마니는 안주하지 않고 브랜드 확장에도 나섰다. ‘아르마니 진’, ‘엠포리오 아르마니’ 등을 론칭했으며, ‘로레알’과 협력하여 향수 시장에도 진출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경, 운동복, 화장품, 액세서리까지 선보였다. ‘아르마니’라는 이름 아래 패션계가 동경할 만한 라이프스타일을 온전히 구축한 것이다. 남성 패션 전문 잡지인 ‘GQ’는 이를 ‘토탈 룩’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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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85년, 갈레오티가 에이즈 관련 질환으로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극도로 사적인 성격이었던 아르마니는 내면으로 숨어들며 은퇴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갈레오티의 모든 희망을 버리느니” 자신이 인내하기로 결심했다.

개인적으로, 사업적으로 오랫동안 동반자였던 갈레오티에 대해 아르마니는 “그는 내가 내 작업물과 에너지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라고 애도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았으나, 2001년 성사된 인터뷰에서 아르마니는 커리어에서 가장 큰 실패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 파트너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라 답했다.

신경 쓸 가족도 없던 그는 오직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는 데만 전념했다.

패션 대기업들이 다른 브랜드를 인수해나가는 동안에도 아르마니는 외부 투자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회사를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재정과 창의성에 대한 통제권도 유지했다. 그리고 수십억달러를 거머쥔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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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한 아르마니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작품에 대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지난 세기 아르마니가 사회 변화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과감히 선언하는 자리였다.

2000년대 중반, 모델 아나 카롤리나 레스톤이 거식증으로 사망한 사건이 알려진 이후, 그는 지나치게 체질량 지수가 낮은 모델은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개장한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호텔의 디자인 역시 아르마니의 작품이다.

열렬한 스포츠 팬이기도 한 그는 첼시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도 디자인했으며, 2012년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 유니폼 디자인도 맡았다.

한편 2014년 그의 새 시즌 출시 행사에 미국 ‘보그’지 편집장인 애나 윈투어가 불참하자 불화설이 제기되었다. 윈투어 편집장은 일정이 겹쳐 참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으나, 이후 그가 “아르마니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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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생일 1달 전인 2024년 6월 파리 패션위크에 참석한 아르마니의 모습

아르마니는 90세가 넘어서도 파리와 밀라노 패션쇼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올해 3월, 그는 자신의 밀라노 쇼에 격랑 치는 국제 정세의 물결에 평온의 기름을 부어 진정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밝혔다. “나는 새로운 조화로움을 상상하고자 했다”는 그는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직접 만난 그는 늘 단정하고 비즈니스적인 사람이었다.

‘뉴욕’ 잡지는 그를 “지독히 절제된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냉혹해 보일 만큼 자제하고, 자신을 통제한다”고 묘사했다.

아르마니는 매일 아침 자신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수영장은 길이 약 45.7m에 너비 약 0.9m에 불과했으며, 왕복 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물만 채워두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수영장 디자인에서도 아르마니의 삶과 사업에 대한 단호한 태도가 엿보인다고 말한다. 간결하면서도 정밀하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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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의 작품 스타일은 변화하는 사회와 언제나 철저히 발맞추어 나갔다.

사회가 향하는 방향에 대한 이토록 날카로운 감각은 밀라노 백화점 현장에서 쌓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곳에서는 고객이 가장 중요했으며, 훌륭한 디자이너라면 변화하는 고객의 요구에 잘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65년 동안 아르마니는 그 임무에 충실했고, 그 결과 ‘포브스’ 추정 130억달러(약 18조원)에 달하는 부를 축적했다.

언젠가 그는 기자에게 “나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고 완벽을 추구하는 집착적인 사람으로서, 제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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