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들키지 않게’ 반짝이던 우리의 시절, 여름

‘내 마음 들키지 않게’ 반짝이던 우리의 시절, 여름

곱씹을수록 이상한 말이었다. 그걸 왜 더블로 할까. 아니 그보다도 나랑 지현이 어떻게 데이트를 해. 하지만 신이 난 경이의 흥을 깰 수가 없어서 그냥 했다. 경이와 노는 것의 확장판이나 번외편 정도로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_40쪽

소년들은 금방 자란다.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채, “한 이불을 덮고” 장난치던 경이와 나.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거라 예고하는 장면은 진즉 등장한다. 경이의 방 천장 얼룩을 덮기 위해 붙여놓은 외계인 포스터를 보며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미지의 존재인 외계인이 무섭고, 경이는 미지의 세계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경이가 “나를 두고” 다른 곳으로 “훌쩍 건너”가 버릴까 봐 두렵다.

아니나 다를까, 기말고사가 끝난 중학교 3학년, 경이는 분명 달라져 있다. 나와 나란히 달리던 경이의 몸과 정신은 이미 다른 궤도를 달리는 듯하다. 경이는 여전히 나와 어떤 시공간을 공유하지만, 학교에서는 “교실 뒤쪽의 애들” 무리와 어울려 놀고, 시도 때도 없이 “여자애들” 이야기를 한다. 반면 나는 교실 앞쪽에 다닥다닥 붙어 영화를 보는 쪽이다. 낮에 재미있게 본 영화 이야기를 해도 경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터미네이터 같은 대흉근을 만들 거라며 팔굽혀펴기”만 계속할 뿐이다.

찌는 듯한 더위, 얼굴 위를 정신없이 흐르는 땀,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공기, 이 모든 것들의 기억을 뒤로 하고, 지난여름을 떠올리면 꼭 반짝이는 모래알 같다. 그렇기에 청춘이 여름으로 비유되곤 하는 것일 테다. 우리에게 존재했던 찬란하고 아프던 시절.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대로 굴러들어 왔다가 흩어지는 감정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사진=소니픽처스]

강석희 작가의 연작소설집 『내 마음 들키지 않게』는 그런 여름을 그린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탐스러운 복숭아 두 알이 놓인 표지는 꼭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 속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와 올리버(아미 해머 분)의 관계가 진전되고 또 멀어지듯, 소설을 여는 「올드 스쿨 러브」 속 가족처럼 붙어 지내던 두 소년 나와 경이의 관계도 한여름을 지나며 진자 운동한다.

성애에 눈 뜬 경이, 학원 아이들의 달뜬 열기, 딱 맞는 남녀성비,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나는 경이네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요란한 고백 소동도 벌이지만, 정작 걱정되는 건 차여도 아무렇지 않은 나의 마음도, 황당한 고백에 당황했을 지현도 아니고, 경이의 마음이다. 나는 실연당한 자의 슬픔을 연기하고, 실연당해 정말로 슬퍼하는 경이를 위로한다. 경이를 이렇게 방황하게 만들고 경이의 웃음을 앗아간 희주를 원망하면서. 경이의 실연은 끝이 아니었고, 앓고 난 경이는 달리기 시작한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뛰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왜 그러는지. 무엇이 너를 그렇게 자꾸 움직이게 하는지.
나의 이해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경이. _62~63쪽

시간은 흐르고, 관계는 변화하고, 상황도 달라진다. 경이네 부모님이 함바집을 시작하고, 경이는 능숙하게 계란말이를 부치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나와 같은 집을 더 이상 공유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고, 나에게 갑자기 동생이 생기고, 서로가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취미도 생기고…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고작 일 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멀미가 날 만큼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나의 세상이.

[사진=Unsplash]

나는 경이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된다. 경이가 그토록 달렸던 건, 그때는 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임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임을. “가만히 있으면 뭔가가 나를 눌러버릴 것 같”아서. 바로 “그것을 향해서” 달리는 행위를, 머리가 아닌 몸이 시켜서 했다.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경이가 온다. 함께 달린다. “경이와 나란히 달리는 일은” 힘들지 않다. 둘은 이제 이따금 함께 달린다. 둘은 다시 서로의 비밀을 나눈다. 서로에게만, 혹은 서로에게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건네보는 비밀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도, 소년들은 그것을 안고 천천히 달릴 수 있다. 불가해한 세상을 함께 달리는 이가 있다는 게 작지 않은 위안이 되어준다.

책을 한 차례 읽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은 음악을 재생하는 것. 「올드 스쿨 러브」만 해도 작가의 말에서 주제곡으로 밝힌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축제’ 말고도 소설 속 노래방 고백 사건 현장에서 선곡되는 백지영의 ‘Sad Salsa’와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 경이가 준비한 “과정이 몹시 복잡한” 고백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H.O.T.의 ‘너와 나’, 신해철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넥스트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 그리고 반 아이들 앞에서 나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노래한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I want it that way’… 1990~2000년대 초반을 수놓은, 한 시절의 음악과 함께 넘기는 책장은 우리를 분명 또 다른 차원의 여름, 반짝이는 그곳으로 데려다 놓을 테니.

[독서신문 이자연 기자]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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