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포스트 손흥민 시대는 갑자기 찾아왔다. 새벽에 하품하며 유럽 생중계를 챙겨보는 한국 축구팬들의 역사는 박지성 현역 시절이 1기, 손흥민의 시대가 2기였다고 할 수 있다. 2기가 끝나는 시점, 다행히 유럽은 허전하지 않다. 한국인 유럽파는 역대 어느 때보다 양과 질 모두 풍성하다. 빅 클럽에서 뛰는 김민재와 이강인부터 이제 도전을 시작하는 박승수와 윤도영까지 가지각색이다. ‘풋볼리스트’는 4가지 시각의 개막 가이드를 마련했다. 유럽파 스타들의 시즌 전망, 큰 무대에 도전 중인 새로운 선수들, 5대 리그 최고 스타들, 새로 빅 리그로 올라온 흥미로운 승격팀까지 미리 정리해 두면 앞으로 한 시즌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편집자 주).
개막의 설렘을 더하는 건 새로운 얼굴, 바로 승격팀이다. 2부리그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뚫고 올라온 이들 중 강팀의 들러리로 남길 바라는 팀은 없다. 패배의 설움, 무너진 자존심, 잊힌 영광 등 각자만의 사연을 안고 최정상 무대에 돌아온 그들은 올 시즌 어떤 이야기를 낳을까. 각양각색의 배경과 매력을 품은 승격 팀들의 ‘죽어도 잔류’를 향한 여정은 이미 시작됐다.
▲ 선덜랜드AFC: 죽기 직전에 돌아왔다!
선덜랜드가 8시즌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로 돌아왔다. PL 출범 전 잉글랜드 1부리그 우승 6회를 거둔 전통 명문 선덜랜드는 지동원, 기성용이 뛰었던 팀으로 축구 팬들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중하위권을 전전한 선덜랜드는 2016-2017시즌 PL 최하위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으로 강등됐다. 강등 이후 선덜랜드의 사투는 2018년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죽어도 선덜랜드’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복귀까지의 여정은 ‘죽음에 가까운 사투’였다. 2017-2018시즌 연이은 강등으로 명문 선덜랜드는 순식간에 잉글랜드 리그원(3부)으로 추락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인한 재정난, 구단 지분 갈등 등 여러 어려움을 극복한 선덜랜드는 2021-2022시즌 가까스로 2부 승격에 성공했다. 이후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전력을 강화한 선덜랜드는 2024-2025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셰필드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극장 역전골을 터트리며 8년 만에 PL 무대로 복귀했다.
강등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덜랜드는 이번엔 ‘죽어도 잔류’를 목표로 삼았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그 의지를 증명했다. PL 경험이 풍부한 그라니트 자카를 비롯해 헤이닐두 만다바, 하비브 디아라 등 미래와 경험을 적절히 배합한 대규모 영입을 감행했다. 현재까지 선덜랜드가 지불한 이적시장 금액은 1억 5,300만 파운드(약 2,850억 원)다. 선덜랜드의 잔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금액이다.
▲ 함부르크SV: 손흥민 키워낸 138년 명문, 현실은 독일 최대 악동?
138년 역사를 자랑하는 함부르크는 1963년 독일 분데스리가 출범 이래 유일하게 강등을 당한 적 없는 명문 클럽이었다. 손흥민을 키워낸 클럽으로도 친숙하다. 2008년 함부르크 유스팀에 입단하며 유럽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고 2013년 바이엘04레버쿠젠으로 떠나기까지 5년간 몸담았다. 그러나 손흥민이 떠나고 불과 5년 뒤 명문 함부르크는 리빌딩 실패로 17위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사상 첫 독일 2.분데스리가(2부) 강등 수모를 겪었다. 함부르크의 상징이었던 1부 잔류 시계는 54년 262일 만에 멈췄다.
몰락한 함부르크는 2부에서 플레이오프권 턱걸이 성적을 연연했다. 좀처럼 승격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함부르크는 2024-2025시즌 후반기 기적적인 반전을 써냈다. 전반기 들쭉날쭉한 경기력으로 8위까지 쳐진 함부르크는 13라운드 끝에 슈테펜 바움가르트 감독을 경질하고 수석코치 메를린 폴친을 감독 대행(후반기 정식 선임)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폴친 체제에서 함부르크는 리그 10경기 무패 행진(6승 4무)을 달렸다. 후반기 반등으로 순위는 어느덧 선두권까지 올랐고 33라운드 올름1846과 홈경기 6-1 대승을 거두며 7년 만에 분데스리가 복귀를 확정지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홈 팬들은 흥분을 가라앉지 못하고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승격의 기쁨을 만끽했다.
7년간 멈췄던 함부르크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귀환으로 새 시즌 분데스리가는 무려 4개의 더비매치가 부활한다. 함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극성 팬 보유 구단이다. 그만큼 타 팀의 적대적인 시선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베르더브레멘과는 북부의 자존심을 건 ‘노르트 더비’, 연고지가 같은 장크트파울리와는 ‘함부르크 더비’가 있다. 지역 감정과 굵직한 선수 이적으로 바이에른 뮌헨, 레버쿠젠과도 관계가 험악하다. 말하자면 독일 최대 악동이 돌아온 것이다. 새 시즌 분데스리가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 레알오비에도: 팬과 선수가 만든 기적, 24년 만의 라리가 귀환
1926년 창단된 레알오비에도는 100년에 가까운 역사에도 라리가 우승은커녕 컵 대회 우승 경력조차 없는 작은 구단이다. 그러나 팬과 선수들의 헌신으로 버텨온 오비에도는 여러 차례의 구단 존폐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오비에도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진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4부리그 강등, 구단 해체설 등 여러 수난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팀을 일으킨 건 팬과 선수들이었다. 팬들은 모금 운동과 무보수 봉사로 힘을 보탰고, 오비에도 출신 선수들은 구단 주식 매입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12년 멕시코 파추카 그룹이 인수에 나서며, 오비에도는 마침내 안정적인 재정을 갖추게 됐다.
정상궤도를 되찾은 오비에도는 지난 시즌 24년 만에 라리가 귀환을 확정했다. 서사의 중심에는 돌아온 전설 산티 카솔라가 있었다. 유스 시절 재정난으로 어쩔 수 없이 팀을 떠났던 카솔라는 2023년 최저 연봉, 유니폼 수익 기부 등 파격 조건으로 친정에 복귀했다. 아킬레스건 수술 후유증으로 40세 노장의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지만, 팀의 중심이 되어 승격 드라마를 완성했다. 카솔라는 스페인 라리가2 승격 플레이오프 준결승과 결승에서 각각 1골씩 기록하며 팀을 1부로 이끌었다. 감명한 오비에도 시장은 도시 대표 광장의 이름을 ‘산티 카솔라 광장’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라리가로 돌아온 오비에도는 새 시즌 ‘최약체’라는 현실적인 전망에도 낭만적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팀의 주장이자 상징인 카솔라와 1년 연장 계약을 맺었고, 전 포지션에 걸쳐 7명의 선수를 영입하며 전력 보강에도 힘을 쏟고 있다. 수많은 위기를 버텨낸 오비에도가 1부 무대에서 어떤 위기를 헤쳐 나가게 될지 기대된다.
▲파리FC: 진정한 파리의 자존심, 그리고 파리 더비의 부활
파리FC는 파리생제르맹(PSG)의 뿌리 격인 팀이다. 1960년대 후반 수도 파리에 빅클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프랑스 주요 인사들의 여론을 중심으로 1969년 파리FC가 창단됐다. 이듬해 스타드 생제르맹이라는 수도 인근 클럽과 합병해 탄생한 팀이 바로 PSG다. 그러나 도시 정체성과 관련된 정치적 다툼으로 1971년 파리FC와 PSG로 갈라지게 됐다. 이후 PSG는 카타르 왕족 자본의 지원을 받으며 지금의 유럽 빅클럽으로 발돋움했고, 파리FC는 1978-1979시즌 강등 이후 지난 시즌까지 줄곧 하부 리그 생활을 전전했다.
파리FC가 47년 만에 프랑스 리그앙으로 돌아왔다. 지난 시즌 2부리그 2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없이 다이렉트 승격에 성공했다. 승격의 뒷배경에는 든든한 자금 지원이 있었다. 2024년 10월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를 소유한 아르노 가문이 파리FC를 인수했다. 더불어 레드불에도 소수 지분을 넘기면서 레드불식 선수 육성 체계를 동시에 구축했다. 인수 직후 아르노 가문은 “파리FC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파리 시민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축구단을 만들겠다”라고 공언했고, 47년 만에 승격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파리FC의 귀환으로 PSG와 더비 매치도 부활했다. 일명 ‘파리 더비’는 앞서 설명한 파리FC와 PSG 사이의 얽힌 여러 역사가 반영된 더비다. 양 팀이 모두 1부에 있던 1978년 두 차례 맞붙어 모두 비긴 것을 끝으로 지금까지 재대결은 없었다. 2025-2026시즌부터 파리FC는 PSG 홈구장 파르크 데 프랭스 바로 옆에 위치한 스타드 장부앵을 홈구장으로 사용할 계획이라 파리 더비는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더비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순수한 파리의 정체성을 내세운 파리FC는 카타르 자본으로 색채가 변한 PSG의 대항마로 어떤 경쟁을 펼칠지 주목된다.
글= 김진혁 기자
사진= 선덜랜드 공식 X 캡쳐, 파리FC 인스타그램 캡쳐, 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