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포스트 손흥민 시대는 갑자기 찾아왔다. 새벽에 하품하며 유럽 생중계를 챙겨보는 한국 축구팬들의 역사는 박지성 현역 시절이 1기, 손흥민의 시대가 2기였다고 할 수 있다. 2기가 끝나는 시점, 다행히 유럽은 허전하지 않다. 한국인 유럽파는 역대 어느 때보다 양과 질 모두 풍성하다. 빅 클럽에서 뛰는 김민재와 이강인부터 이제 도전을 시작하는 박승수와 윤도영까지 가지각색이다. ‘풋볼리스트’는 4가지 시각의 개막 가이드를 마련했다. 유럽파 스타들의 시즌 전망, 큰 무대에 도전 중인 새로운 선수들, 5대 리그 최고 스타들, 새로 빅 리그로 올라온 흥미로운 승격팀까지 미리 정리해 두면 앞으로 한 시즌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편집자 주).
손흥민이 토트넘홋스퍼에 입단하던 10년 전만 해도 유럽 무대는 완성된 선수들만 갈 수 있는 무대로 여겨졌다. 손흥민 같이 유럽에서 프로에 데뷔한 사례도 있었기에 유망주들이 유럽에 도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검증된 일부 선수들만이 유럽에서 지속적인 출장을 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조금만 잠재력이 보이면 유럽 무대를 노크할 수 있다. 유럽 팀들이 기존에 애용하던 남아메리카 유망주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상대적으로 가성비가 좋은 아시아 무대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J리그와 함께 K리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활약한 선배들의 후광 속에 좋은 기대주들을 보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K리그 어린 선수들의 진출 시기도 많이 앞당겨졌다.
▲ 2007년생 박승수, ’06 형들’ 양민혁·윤도영보다 먼저 PL 데뷔?
2023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에 참가했던 유망주들이 차례로 PL에 입성했다. 우선 강원FC에서 뛰던 양민혁은 지난여름 토트넘 입단을 확정지었고, K리그 12골 6도움으로 올해의 영플레이어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유럽으로 떠났다. 올여름에는 대전하나시티즌 기대주 윤도영이 브라이턴앤드호브앨비언으로 이적한 데 이어 K리그2 수원삼성 박승수도 뉴캐슬유나이티드에 합류했다.
양민혁과 윤도영은 각각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포츠머스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엑셀시오르로 임대를 떠났다. 두 선수의 임대는 시즌 개막 전부터 사실상 정해져있었다. 토트넘과 브라이턴은 양민혁과 윤도영이 1군에서 주전 경쟁을 펼치는 것보다 임대를 떠나 꾸준한 출전을 보장받는 게 성장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시즌 개막 후 양민혁은 공식 2경기, 윤도영은 리그 첫경기를 소화했다.
뜻밖에 박승수는 PL 데뷔 기회를 엿보고 있다. 뉴캐슬 이적 후 홈그로운(Home-grown)을 위해 U21팀에서 발전을 도모하는 게 뉴캐슬의 기존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디 하우 뉴캐슬 감독이 프리시즌 동안 박승수의 활약을 눈여겨봤고, 에스파뇰과 경기에서 레프트윙으로 선발 출장시켜 1군과 융화 가능성을 점검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는 “지금으로선 박승수는 1군과 동행한다. 그는 스스로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을 얻었다”라며 합격점을 내렸다. 현재 흐름이라면 잉글랜드 카라바오컵(리그컵)을 통해 데뷔에 도전하고, 나아가 PL 데뷔라는 꿈까지 가닿을 수 있다.
▲ 지난 시즌 아쉬웠던 권혁규와 홍현석, 한솥밥 먹으며 반전 도모
권혁규와 홍현석의 지난 시즌은 아쉬웠다. 권혁규는 히버니언으로 임대를 떠나 초중반에는 리그 경기에 꾸준히 출장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입지가 줄었고, 3월 이후에는 아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홍현석 역시 마인츠로 이적해 초반 이재성과 2선에서 듀오를 이루는 듯했으나 파울 네벨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543분 출장에 그쳤다.
두 선수는 성장을 위해 팀을 옮겼고, 공교롭게도 낭트에서 만났다. 낭트는 지난 시즌 프랑스 리그1에서 13위로 중하위권에 머문 팀이다. 전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면에서 권혁규와 홍현석이 주전을 차지하기에 한결 유리하다. 감독은 지난 시즌 프랑스 2부 팀인 뒹케르크를 이끌고 쿠프 드 프랑스(프랑스 FA컵) 4강에 오른 루이스 카스트루인데, 그가 4-1-4-1에 가까운 4-3-3 전형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인 권혁규 기용은 확정적이다. 홍현석은 낭트 초신성인 2006년생 루이 르루와 경쟁 구도를 갖출 걸로 보인다.
만약 두 선수가 낭트에서 좋은 호흡을 보인다면 대표팀에도 장기적인 호재가 될 수 있다. 홍현석은 대표팀에서 이재성이 맡은 공격형 미드필더, 권혁규는 박용우가 맡은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장기적 대체자로 여겨진다. 두 선수가 걸출한 중원 조합이 돼 낭트의 성적을 끌어올린다면 대표팀에서도 두 선수를 함께 기용하는 걸 고려할 수밖에 없다.
권혁규와 홍현석 외에도 한 팀에서 꿈을 키우는 젊은 선수들이 있다. 2001년생 이강희와 2002년생 이태석이다. 두 선수는 현재 오스트리아 리그의 아우스트리아빈에서 함께 뛴다. 이강희는 올여름 일찌감치 이적해 이미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매김했고, 이태석도 왼쪽 윙백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태석은 대표팀에서 레프트백 입지를 굳혔는데, 이강희의 활약이 꾸준하다면 스리백을 염두에 두는 대표팀에 좋은 옵션이 될 것이다.
▲ ‘포스트 김민재 시대’ 책임질 이한범과 김지수
김민재가 한국 센터백의 왕도를 걷고 있다면, 2002년생 이한범과 2004년생 김지수는 그보다는 한 단계 낮은 리그에서 훗날 대표팀의 방패가 될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한범은 유럽 무대 첫 도전이었던 2023-2024시즌 철저하게 후보였고, 지난 시즌 중반부까지도 마스 베흐 쇠렌센과 우스망 디아오 센터백 조합에 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디아오가 실책과 퇴장을 당한 이후 이한범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한범은 안정적인 활약으로 현재까지 리그 4경기, 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 예선 3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다만 최근 500만 유로(약 81억 원)에 이탈리아 세리에A 볼로냐에서 마르틴 에를리치가 영입되면서 다시금 주전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김지수는 2시즌 동안 홈그로운을 위해 브렌트퍼드에 머물다가 올여름 과감하게 독일 2부의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임대를 떠났다. 지난 시즌 PL 데뷔를 이루는 등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성장을 위해 실전 소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김지수는 출전시간을 보장받고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떠났고, 하노버와 리그 개막전 교체 출장에 이어 지난 샬케와 경기에서는 선발로 풀타임을 소화했다. 김지수가 독일 2부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친다면 충분히 유럽 빅리그 도약도 가능하다.
▲ 유럽에 있는 수많은 기대주들
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유럽에서 부딪히고 있다. 고영준은 세르비아 파르티잔을 떠나 폴란드 구르니크자브제에 합류했다. 이현주도 바이에른뮌헨을 완전히 떠나 포르투갈 아로카에서 새출발을 했다. 김민수는 지로나에서 스페인 2부 안도라로 임대를 갔다. 조진호 역시 페네르바체에서 콘야스포르로 튀르키예 쉬페르리그 내에서 이동을 했다. 이영준은 이번 시즌에도 그라스호퍼클럽취리히에서 도전을 이어가며, 배승균은 보인고등학교에서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 네덜란드 2부 도르드레흐트 임대로 유럽 무대에 발을 디뎠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포츠머스 홈페이지, 낭트 인스타그램, 안도라 홈페이지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