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사라지는 소풍, 멀어지는 김밥의 추억

[시간들] 사라지는 소풍, 멀어지는 김밥의 추억

세월호, 초등생 용변 사건으로 일선학교 소풍기피 확산

소풍 사고시 교사 민형사 책임 면제에도 기피 심각해져

베이비붐 때 소풍은 인생 학습장, 구시대 유물 인식 곤란

사고예방 중요하나 학생의 소중한 권리마저 빼앗아선 안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2017년 5월, 대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가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현장체험학습(소풍·견학)을 가던 길에 여학생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됐다.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진 여학생을 버스 안에서 용변을 보게 하고 부모와 연락한 뒤 가까운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려준 게 화근이었다. 학부모는 딸을 홀로 1시간가량 휴게소에 있게 한 건 아동학대라며 경찰에 신고했고, 소송으로 번졌다. 법원은 교사를 벌금형에 처해 교단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20년 전만 해도…즐거운 봄소풍 가는 어린이들

화창한 날씨 속에 봄 소풍 길에 오른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들뜬 표정으로 꽃길을 지나고 있다./이재혁/지방/2004.4.21 (대구=연합뉴스)

초등생 소풍 유기 사건은 3년 전 세월호 사태로 힘을 얻은 소풍 폐지론에 기름을 부었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교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차라리 없애자”는 청원이 등장했다. 한편에선 소풍은 학창 시절 소중한 추억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필수 교육 중 하나라며 없애면 안 된다는 목소리도 일었지만,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는 ‘신세대’ 부모들의 성화에 묻혔다. 이 사건은 학기 중 가족여행 등 학생 개인의 야외 활동이 현장학습으로 대체되는 계기가 됐다.

소풍 중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교사의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학교안전사고예방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일선 학교의 기피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올해 서울 지역 학교의 경우 소풍 및 견학 건수가 지난해보다 36%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학교는 소풍에 학급당 1명의 인솔 인력을 지원하는 등 각 시도 교육청이 사고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인 듯하다.

1982년까지 한 해 출생아 수는 최대 100만명에서 최소 80만명 수준이었다. 23만명인 지난해에 비하면 최대 4배 차이가 난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서울의 한 학급 학생 수가 평균 70명이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교사들이 어떻게 그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소풍 때 인솔할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풍 나와 잔디밭에서 김밥 먹는 아이들

(수원=연합뉴스) 신영근 기자 = 싸늘한 새벽 기온과 달리 오후 들어 봄 기운을 회복한 15일 오후 경기도 수원 경기도청 잔디밭으로 소풍을 나선 어린이들이 김밥을 먹으며 다가온 봄을 즐기고 있다. 2010.4.15

개도국 시절 소풍은 콩나물시루에 갇혀있던 학생들에게 유일한 쉼터였지만 가난했던 많은 이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한 게 부끄러워 나무 숲에 숨어야 했던 많은 제자에게 선생님은 손수 준비한 김밥을 슬쩍 건넸고, 아이들은 덕분에 ‘엄마의 정성’이 담긴 김밥을 서로 나누며 봄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 소풍을 일제와 군사독재의 어두운 유산이니 하는 이념 프레임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이유다. 더구나 일본에선 소풍을 엔소쿠(遠足:원족)로 부른다.

학교 안전사고 예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아이들의 권리마저 빼앗는 것 또한 지나치다. 고유의 한자어인 소풍(逍風)은 바람을 맞으며 노닌다는 뜻이다. 사교육에 갇힌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봄바람을 쐬며 즐겁게 노닐게 하는 게 이리도 어렵다니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다.

jahn@yna.co.kr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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