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항일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의 삶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일제에 체포돼 모진 옥고를 치렀다. 숭의여학교 재학 중 스승 박현숙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에 가입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폭탄 제조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활동에 나섰으며, 여성전도대를 조직해 동지 간 연락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9월, 건멸치배에 몸을 숨겨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도착 직후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랐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단발 여성인 셈이다.
1923년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윈난 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비행·조종기술· 지상실습교육 등 혹독한 훈련 끝에 졸업하며 대한민국 첫 여성 비행사가 됐다.
앞서 권기옥이 16세 시절이던 1917년 서울 여의도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본 경험이 비행사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비행 기술을 익혀 조선총독부와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권기옥은 1926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난 이상정(1896~1947)과 결혼을 하게 된다.
권기옥의 나이는 26살. 당시 남편 이상정의 어깨에 걸쳐 찍은 사진의 모습이 두 사람의 평등한 부부 관계임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졸업 후 중국군 장군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복무했다. 그녀가 윈난 육군항공학교에서 훈련용 비행기 꼬드롱 G.3(프랑스 제·1913년)를 운행한 기록도 남아 있다.
권기옥은 중일전쟁 때는 충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일본인 식별법, 일본인 성격 등 적에 대한 정보를 연구했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사교 부장으로 활동하며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 1948년 귀국한 권기옥은 1950~1955년 국회 국방위원회 유일한 여성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하는 등 ‘공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권기옥의 삶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드물었던 시대에 하늘로 날아올라 조국 독립을 향해 싸운 신여성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참고자료 : 국립항공박물관,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이자 항공독립운동가 권기옥(202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