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영국의 한 서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정부가 만든 선전 포스터가 발견됐다. 이후 이 포스터는 21세기 영국에서 놀라울 정도의 반향을 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 섞인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이 포스터와 그 메시지는 계속해서 새로운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2000년 봄, 노섬벌랜드 앨닉의 과거 빅토리아 시대 기차역을 개조해 운영 중인 중고책 서점 ‘바터 북스’에서 포스터 한 장이 발견됐다. 먼지가 쌓인 상자 안에 있던 이 포스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부가 선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붉은색 바탕의 포스터에는 튜더 왕조의 왕관이 상단에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Keep Calm and Carry On”(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이어가자, 이하 ‘킵 캄 앤드 캐리 온’)이라는 담담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이후 이 포스터는 전 세계 디자인계에서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21세기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적 슬로건으로 떠올랐다.
이 포스터는 1939년, 전쟁 위기 속에서 대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영국 정보부가 외부에 의뢰해 만든 포스터 중 하나다. 하지만 이 포스터는 공식 발표도 없었고, 대중에 공개된 사례도 거의 없었다. 런던 국립 육군박물관의 선임 역사학자인 다니엘 카울링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가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포스터, 영화, 라디오, 책, 팸플릿 등을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킵캄앤드캐리온 포스터 외에도 두 개의 다른 포스터가 있었다. 하나는 “Your Courage, Your Cheerfulness, Your Resolution Will Bring Us Victory and Freedom is in Peril”(자유가 위험에 처했다. 당신의 용기, 당신의 쾌활함, 당신의 결심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라는 포스터였고, 다른 하나는 “Defend it with All Your Might”(온 힘을 다해 지켜내자)”라는 포스터였다.
카울링 박사는 BBC 인터뷰에서 “당시는 전쟁이 임박한 상황이었고, 폭격으로 인해 사회가 급속하게 붕괴될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말했다. “킵캄앤드캐리온 포스터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혼란이 예상되는 영국인의 극기 정신을 활용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 가지 포스터 중 두 개는 기차역, 공장, 상점 창문에 부착되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카울링 박사는 ‘매스 옵저베이션’ 설문 기록에 따르면, 집 주변 곳곳에 포스터를 붙인 캠페인에 대한 대중 반응이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영국의 마을과 도시들은 집중 폭격을 받았지만, 사회는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시민이 회복탄력성을 발휘해 힘을 합쳐 난관을 헤쳐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영국인들은 킵캄앤드캐리온 포스터가 오히려 자신들을 깔보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 포스터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어니스트 월쿠신스가 디자인하고 약 250만 부를 인쇄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공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1940년 전쟁 물자용 펄프를 마련하기 위해, 인쇄 물량 대부분을 분쇄해 펄프로 만들었다. 때문에 현재는 바터 북스 상자에 있던 포스터를 포함해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소량만 남아 있다.
바터 북스 점주인 스튜어트와 메리 맨리 부부는 상자 속에서 포스터를 발견하자마자 매료됐다. 스튜어트 맨리는 BBC에 “우리는 이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서점에 전시하기로 했다”며 “그때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메리가 인쇄를 통해 복사본을 만드는 것에 반대해서, 몰래 사본을 인쇄했습니다. 하지만 복사본이 인기를 끌자 메리도 곧 마음을 바꿨죠.”
처음 몇 년 동안 이 포스터는 서점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2005년 가디언의 저널리스트 수지 스타이너가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아이템 10선’ 기사에서 이 포스터를 다루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맨리는 “그 후 한 달 동안 우리 서점 직원들은 전 세계로 보낼 포스터만 포장했다”고 말했다.
21세기에 일어난 일
이 포스터는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그 배경에는 빠르게 성장하는 인터넷 문화와 대중이 가진 아이러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등장한 포스터는 곧 새로운 세상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영국의 극기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떠오른 동시에,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에섹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왕립 역사학회 회장인 루시 녹스 박사는 BBC에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배적인 기억, 즉 전쟁은 영국의 저력이 빛난 ‘최고의 시간’이었다는 점과, 사람들이 압도될 수 있는 상황에 맞서 태연하게 ‘계속 나아갔던’ 시간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 포스터가 그토록 강력한 반향을 일으킨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터는 2007년까지 약 5만 장이 판매됐으며, 이후로도 인기는 계속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침체된 2009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이어가자’는 슬로건이 울려 퍼졌다. 금욕주의적으로 차분한 대응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경제적 혼란 속에서 안도감을 주고, 품위를 잃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는 상징이 되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고든 브라운은 사무실 벽에 이 포스터를 걸어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라디오 DJ 크리스 에반스, 루퍼트 그린트, 제임스 메이 등 유명 인사들도 이 포스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으며 이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케이티 패리 리즈 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는 BBC에 “포스터의 슬로건은 영국의 금욕주의와 고통에 대한 인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영국을 시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며 “여기에는 우리의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이루는 극기 정신이 시각적으로 구현되어 있다”고 말했다.
포스터의 메시지는 인터넷 보급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티셔츠, 머그컵, 열쇠고리, 벽 등에서 이 메시지를 볼 수 있으며, 심지어 독일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다양하게 재해석되어 새로운 밈이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Keep Calm and Drink Tea(차분함을 유지하며 차를 마시라)’, ‘Keep Calm and Code On(차분함을 유지하며 코드를 작성하라)’, ‘Keep Calm and Have a Cupcake(차분하게 컵케이크를 먹어라)’ 등이 있다.
디자인의 단순함
패리는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이 이 메시지를 “새로운 상황과 사회적 도전에 맞게 조정(Keep Calm and Resist)해 원래의 선전성 메시지를 전복시킨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기존의 친숙한 문구를 활용해 대중의 관심을 빠르게 모으는 전술이자, 기억에 오래 남으면서 재치 있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터의 담백함도 대중의 공감을 얻는 데 기여했다. “빨간색 바탕에 흰색 산세리프 서체로 쓰여진 다섯 개의 큰 단어와 상단에 왕관을 배치한 디자인은 단순함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빨간색은 강렬해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다양한 미디어 메시지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이 포스터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포스터 디자인에 대한 페리의 설명이다.
포스터를 다양한 형태로 모방하고 전시 상황의 엄숙한 메시지를 세속적인 소비재 상품 홍보에 이용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인 조나단 반북은 BBC에 “반 고흐의 자화상, 뭉크의 절규와 같은 그림은 매우 강렬한 작품이지만, 문화적으로 끝없이 전복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가장 심각한 상황도 부드러움, 유머, 심지어 부조리함 등 예상치 못한 것으로 전복시킬 수 있다고 했다. “고통을 놀이로 바꾸거나 괴로움을 이해로 바꾸는 것은 우리가 서로 유대감을 쌓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없는 패러디와 새로운 결과물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포스터를 영국 엘리트주의와 전시 선전의 상징물로 보고, 여기에 담긴 메시지가 진정한 위기에 대한 무감각한 대응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이 항상 정답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이 불굴의 정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해 온 평론가들도 있다. 또한 ‘Now Panic and Freak Out(지금은 당황하고 공포감을 느끼자)’, ‘Keep Calm and Drink Wine(차분함을 유지하며 와인을 마시자)’ 등 끝없는 패러디로 원래 의미가 퇴색된 사례도 있다.
오웬 헤더리는 2016년 가디언에 실린 “국가를 유혹한 슬로건 뒤에 숨겨진 불길한 메시지”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이 포스터의 메시지를 “금욕적 내핍에 대한 향수”라고 평가했다. 그는 “킵캅앤드캐리온의 힘은 영국 귀족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버티는 태도를 동경하는 데서 나온다”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물질과 소비에 전념하고, 집값을 기준으로 선거 결과가 결정되며, 갑작스럽게 어떤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이 나라에서는 오로지 대중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포스터는 억압받는 자의 귀환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 그 자체의 귀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스터가 아직도 주목받는 이유는 혼란 속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많은 재창작 속에서도 포스터의 핵심 메시지인 ‘역경 속 침착한 인내’는 여전히 큰 반향을 일으킨다. 포스터가 수많은 밈 문화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해 적용될 수 있고, 위기 상황과 코미디 모두에 어울리는 차분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페리는 “밈 문화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며 “오래된 밈이 재미있는 형태 혹은 진지한 형태로 갑자기 재등장할 때 특정한 가치가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2017년 저서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이어가자: 포스터 뒤에 숨겨진 진실’을 쓴 벡스 루이스 박사는 당시에는 이 포스터가 사람들을 약간 깔보는 것 같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우리의 반어적 감각에 호소한다”고 했다.
이 포스터에 대한 대중의 반향에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단순히 “함께 지내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인기를 보면 이 포스터가 처음부터 한 국가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전 세계적인 문화의 일부로 남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브룩은 오늘날은 사람이나 기계로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이 포스터가 “끝없이 만들어지거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매우 강렬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역사가 깃든 이 한 장의 디자인은 회복력에서 체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전 세계적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