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5일 경기 용인시 비전스퀘어에서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 전시 ‘움직임의 유산’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기아 제공) 2025.12.05.
크리스마스이브였던 24일 오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예고 없이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의 자율주행 핵심 기지 ‘포티투닷(42dot)’ 본사를 찾았다. 정 회장은 아이오닉 6 기반 자율주행차를 직접 시승하며 판교 일대를 돌았다. 시승 차량에는 포티투닷이 개발한 ‘엔드투엔드(E2E)’ 기술이 탑재됐는데, 이는 AI가 주행 데이터를 통째로 학습해 판단과 제어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식이다.
바로 이 E2E 기술로 테슬라는 11월 국내에서도 감독형 완전자율주행(FSD) 서비스를 선보이는 등 자율주행 시장을 독주 중이다. 테슬라 차량이 운전이 험하기로 소문난 부산에서도 부드럽게 운전을 이어가는 영상에는 “기술 격차가 적지 않다”는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그룹 내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전략을 총괄하던 송창현 사장까지 이달 초 물러나면서 위기감은 한층 고조됐다. 그 가운데 이뤄진 정 회장의 현장 점검은 내년부터 본격화될 글로벌 자율주행 경쟁을 앞두고 전열을 재정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 ‘레거시의 짐’ 안고 뛰는 불리한 싸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5일 경기 용인시 비전스퀘어에서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 전시 ‘움직임의 유산’을 관람하고 있다. 2025.12.05. 사진=현대차·기아 제공
글로벌 자율주행 시장에서는 미국과 중국 ‘G2’의 속도전이 한창이다. 테슬라의 FSD 누적 주행거리는 28일(현지 시간) 기준 70억 마일(112억6541만 km)을 돌파했다. 전 세계 600만 대의 차량을 보급하며 FSD 사용자를 대거 확보하면서다. 특히 AI 학습에 결정적인 ‘도심 주행’ 데이터가 25억 마일을 넘어서며 경쟁사와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중국 바이두의 ‘아폴로 고’도 레벨4 자율주행 누적 거리 2억4000만 km를 넘어섰다. 현대차-앱티브 합작사 모셔널이 7월 기준 1억6000만 km를 갓 넘긴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뚜렷하다. 주행 데이터가 AI 성능을 좌우하는 특성상, 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문가들은 ‘레거시 기업의 딜레마’를 원인으로 진단한다. 실제로 작년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은 현대차·기아 2.9%, 테슬라 4.6%, 비야디 7.0%였는데, 테슬라가 해당 R&D 예산을 소수 모델에 집중해 AI와 로보틱스를 끌어올리는 동안 현대차는 내연기관부터 수소차까지 수십 개 라인업을 동시 개발했다. 자원 분산이 불가피한 구조적 한계가 기술 격차로 이어지는 셈이다. 국내 모빌리티 업체 한 임원은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 레거시 기업의 자율주행 전환 성공 사례가 드물다”며 “현대차·기아는 기존 내연기관차 개발과 전동화·자율주행 전환을 동시에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 2025년, 추격자 아닌 개척자로 거듭날까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0일 밤 서울 강남구 코엑스광장에서 지포스(GeForce) 한국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함께 올라 인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5.10.30/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자율주행차 시장은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한번 선점한 업체가 고객을 ‘록인(lock-in)’시키면 되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FSD 소프트웨어 판매를 구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자율주행 기업 대표 A는 “자율주행은 윈도나 안드로이드 같은 OS 성격이 강해 한번 익숙해지면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이미 미중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장 선점에 나섰다. 중국은 연초 스마트 교통 인프라에 5000억 위안(약 103조 원) 투자를 발표했고, 미국은 민간 펀딩으로 연간 182억 달러(약 26조3000억원)를 쏟아붓는다. 반면 한국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자율주행 등 AI에 책정한 R&D 예산은 1조 원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표준화 리더십마저 공백 상태다. 11월 7일 현대차, 삼성전자 등 65개 기업이 참여해 출범한 ‘SDV 표준화 협의체’는 2026년까지 자율주행 표준 마련을 목표로 했으나, 초대 의장 송창현 사장이 한 달 만에 사임하며 사령탑을 잃었다. 소프트웨어 API, 아키텍처 등 필수 표준을 정립해야 할 시점에 이를 조율할 리더십이 사라진 것이다.
범부처 자율주행 사업을 총괄하는 자율주행기술개발혁신사업단의 정광복 단장은 “산업통상부는 SDV, 과기정통부는 데이터 수집, 국토부는 실증 중심 사업을 하고 있다“며 ”이처럼 부처별로 진행되는 것보다 하나의 컨트롤타워에서 전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최원영 기자 o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