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와의 갈등, 싸움을 피힌다고 평화가 찾아올까?
어떤 집에는 언제나 고요가 흐른다. 저녁 식탁 위에서는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만 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볼 때도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다.
주말 오후의 햇살은 거실 바닥에 길게 늘어지지만, 그 온기는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데우지 못한다. 방문객들은 이 풍경을 두고 다툼 한번 없는 평화로운 관계라 칭찬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집의 문이 닫히고 나면,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하는 소리 없는 전쟁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당신이 관계의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려 할 때마다 공기가 얼어붙고, 결국 당신 스스로 입을 닫아버림으로써 얻어진 침묵. 그건 평화가 아니라 항복이다.
그는 자신을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나는 시끄러운 게 딱 질색이야.”, “좋게 좋게 넘어가면 될 일을 왜 굳이 따지고 들어?” 그가 자주 하는 이 말들은 언뜻 어른스럽고 관대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평화의 실체는 무엇인가.
진정한 평화는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고, 갈등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견고한 신뢰의 상태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더 단단해진 땅과 같다.
그러나 그의 평화는 애초에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의 평 ‘화’는 당신의 감정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자신의 세계 밖으로 밀어내야만 유지된다.
당신의 서운함, 당신의 논리, 당신의 눈물은 그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순물이자 소음일 뿐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해 ‘함께’ 평화를 만드는 대신, 소음의 근원인 당신을 침묵시켜 ‘자신만의’ 고요를 지키려 한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정전(停戰) 상태다. 그리고 그 정전의 조건은 당신의 완전한 침묵이다.
침묵의 기술, 보이지 않는 무기들
그가 당신을 침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소리치거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식을 통해 당신을 서서히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든다.
그의 갈등 대처 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끊임없이 비껴감으로써, 결국 당신을 지치게 만들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정교한 소모전이다.
첫 번째 무기는 ‘벽’이다. 당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그는 투명하지만 단단한 벽을 세운다.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눈물의 애원도 그 벽을 뚫지 못한다. 당신의 말은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결국 당신 혼자 떠드는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당신이 그 벽 앞에서 절망하고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지막이 말한다. “봐, 또 그렇게 흥분하지. 이러니 내가 대화를 할 수가 없어.” 모든 원인은 당신의 감정 조절 실패 탓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회피를 당신의 미성숙함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
두 번째 무기는 ‘영혼 없는 사과’다. 갈등이 길어질 것 같으면, 그는 아주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던진다. 하지만 그 사과에는 어떤 성찰도, 변화의 의지도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이 불편한 상황을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탈출 버튼에 가깝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됐지?”라는 말속에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소모를 멈추기 위해 내가 졌다.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사과는 화해의 손길이 아니라, 당신의 입을 막기 위한 재갈이다. 그 영혼 없는 사과 앞에서 당신은 더 이상 말을 이을 힘을 잃는다.
문제를 제기한 당신만 속 좁은 사람이 되고, 그는 쿨하게 사과하고 넘어가는 대범한 사람이 된다. 그는 그렇게 또 한 번의 갈등을 ‘승리’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그는 너무나 잘 안다.
마지막 무기는 ‘주제 비틀기’다. 당신이 진지하게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갑자기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주말에 뭘 할지 묻는다. 당신의 절박한 호소는 그의 능숙한 화제 전환 앞에서 길을 잃는다.
이는 당신의 문제를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묘한 기술이다. 당신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 애쓸수록, 분위기를 망치는 집요한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결국 당신은 대화를 포기한다. 그는 당신의 문제 제기를 무력화시키고, 일상의 평온함을 지켜낸 유능한 가장 혹은 연인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감정의 폐허, 당신에게 남겨진 것들
그가 만들어낸 기만적인 평화 뒤에는 언제나 당신의 몫으로 남겨진 감정의 잔해가 있다. 갈 곳을 잃은 당신의 서운함과 분노,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쓰레기처럼 당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당신의 영혼을 썩게 만든다. 이 감정의 찌꺼기들은 관계에 대한 깊은 불신이 되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된다.
가장 먼저 당신은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그가 또 힘들어하겠지.’,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몰라.’, ‘결국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 거야.’ 당신은 관계의 평화를 위해, 정확히는 그가 만들어 놓은 고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서운한 일이 있어도 괜찮은 척하고, 화가 나도 웃어넘긴다. 당신은 어느새 그의 평화를 지키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 있다. 그의 고요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세상이 소리를 잃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길들여짐이다.
다음으로 당신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당신의 감정이 그의 세상에서 계속해서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면, 당신은 결국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이 외로움이 정말 맞는 걸까?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 당신의 슬픔은 그의 논리 앞에서 ‘비이성적인 것’이 되고, 당신의 분노는 그의 침묵 앞에서 ‘히스테리’가 된다.
그는 당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평가함으로써, 당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당신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흔드는, 가장 깊은 형태의 폭력이다.
결국 이 관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심지어 이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한 쌍의 연인 혹은 부부.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망쳤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곳에는 교감도, 위로도, 진정한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깨지기 쉬운 고요와 그 고요를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긴장감만이 감돌 뿐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평화의 진짜 모습이다. 모든 생명력이 사라진, 박제된 풍경 같은 평화.
그가 지키려는 평화는 당신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만 유지되는 그의 평화는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가.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갈등의 부재가 곧 관계의 건강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시끄럽게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기꺼이 그 과정을 함께 통과하려는 의지야말로 관계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평화 속에 살고 있는가. 폭풍우가 지나간 뒤 찾아오는 맑은 하늘 아래의 평화인가, 아니면 모든 소리가 죽어버린 진공 속의 평화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질식할 듯한 관계에서 벗어날 첫걸음을 뗄 수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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