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초연…배삼식 대본·최우정 작곡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하던 말이 노래로 이어지고,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말로 이어간다. 한 인물의 노래와 대사 안에 표준어와 안동 사투리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대사로만 이루어진 극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음악극이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배삼식이 자신이 극본을 쓴 동명 연극을 토대로 대본을 쓰고 최우정이 작곡한 국립오페라단의 ‘화전가’가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의 막을 올렸다. 1950년 4월, 경북 안동 어느 집안의 여인들 이야기다.
안주인 김씨의 환갑을 맞아 세 딸과 두 며느리, 청상과부인 고모와 행랑어멈 모녀 등 아홉 여인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삶의 슬픔과 즐거움을 수다로 나눈다. 독립운동하던 김씨 남편은 해방이 된 뒤에도 소식이 없고, 큰아들은 병으로 죽었고, 작은아들은 좌익으로 몰려 감옥살이 중이다. 사위 하나는 북으로 갔고 다른 하나는 친일파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좌우 대립의 역사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이 여성들의 개별적인 서사는 1막부터 서서히 드러나 4막의 아리아들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과거의 상처를 헤집으며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는가 하면,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김씨는 자신의 환갑잔치 대신 꽃도 보고 노래도 부르러 ‘화전놀이’를 나서자고 모두에게 제안한다.
슬픔을 길게 끌지 않고 재빨리 해학으로 넘기는 배삼식의 리드미컬한 대본처럼 최우정의 음악 역시 재치가 넘치는 전환을 통해 눈물을 웃음으로 바꿔놓았다. 그런 중에도 음악은 작위적으로 감정의 흐름을 차단하는 일이 없었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 슬픔을 충분히 되새기고 쏟아내게 했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시적인 언어와 음악으로 알려주는 1막이 비교적 차분하고 엄숙하게 진행된다면 그에 이어지는 2막은 초콜릿과 커피, 설탕 소재의 명랑한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이때 바흐의 ‘커피 칸타타’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음악이 절묘한 순간에 등장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국악 장단, 팝, 바로크 및 고전주의 음악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뒤섞어 음악적 해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곡가 최우정이 한국적 뮤지컬이라 할 20세기 전반의 ‘악극'(樂劇) 형식을 서양 오페라 형식과 결합해 현대에 되살리려 한 덕분이다. 오케스트라에 여러 타악기와 피아노, 아코디언, 기타가 포함된 것도 장르를 유연하게 하려는 작곡가의 뜻을 반영한다.
이 음악극에서 성악과 대사는 이중 구조를 갖는다. 성악가들은 아리아를 표준어로 노래하지만, 대사는 안동 사투리로 구사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주요 음악적 모티프를 성악과 오케스트라 성부에 지속해서 반복 등장시켜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추구한 것도 유의미한 특징이다.
송안훈이 지휘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리듬과 장단이 시시각각 변하는 이 작품을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연주했다. 깊은 호흡과 여백으로 인물들의 한(恨)을, 빠른 변환으로 상황의 유머를 효과적으로 교차시키는 데 성공했다.
연극 ‘화전가’와 차별되는 중요한 차이는 코러스의 등장이다. 해방과 함께 만주 땅에서 귀향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화전놀이에 나서는 화사한 차림새로 노래와 연기를 함께 소화한 국립오페라단 위너오페라합창단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연출과 안무를 맡아 솔리스트와 합창단의 동선과 연기를 치밀하게 구성한 연출가 정영두는 무대 위 여러 인물의 상호작용에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커피를 예찬하는 장면에서 무용수들이 커피잔과 접시를 들고 부채춤을 추듯 원을 그리는 모습은 음악의 위트와 탁월하게 조화를 이뤘다.
김씨 역을 노래한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은 어느 음역에서든 흔들림 없는 탄탄한 발성과 깊이 있는 표현력으로 극 전체의 중심을 잡아줬다. 고모 역의 김선정, 세 딸 역을 맡은 오예은·이미영·윤상아, 두 며느리 역의 최혜경·김수정, 독골할매와 수양딸 역의 임은경과 양제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배역이 바로 그 인물인 듯한 완벽한 일체감을 보여주며 성악적으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주변에서는 조용히 눈물을 닦거나 훌쩍이는 관객도 여럿 보였다. 역사의 질곡에서 상실과 상처를 견뎌낸 이들의 설움이 우리 시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 순간이었다. 공연은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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