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될 권리’ 빼앗긴 성소수자들…전미도서상 소설 ‘암전들’

‘기록될 권리’ 빼앗긴 성소수자들…전미도서상 소설 ‘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장편…”소외된 퀴어 서사에 생동감 불어넣어”

[열린책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떠돌이들의 집이자 사막의 폐허나 다름없는 ‘팰리스’라는 이름의 작은 요양시설.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비쩍 마른 노인 후안 게이의 방에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후안에게 ‘네네'(스페인어로 어린 소년을 부르는 애칭)라고 불리는 이 20대 후반의 남자는 오갈 곳 없이 떠돌다가 10년 전 같은 정신병원 환자로 인연을 맺은 후안을 찾아온다.

후안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그와 같은 성(姓)을 가진 잰 게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완성해달라고 네네에게 당부한다. 그러면서 네네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털어놓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팰리스에 정착한 네네는 얼마 뒤 후안이 자신에게 완성해달라고 했던 두 권짜리 연구서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이하 ‘성적 변종들’)를 무심코 펼쳐본다.

“첫 권인 ‘남성’을 펼쳤을 때의 충격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책등의 접착제가 삭은 것도 모른 채 무심코 책을 펼치자 떨어져 나온 페이지들이 바닥에 무질서하게 흩어졌는데, 대부분 검은색 마커로 뒤덮여 있었다.”(본문에서)

최근 번역 출간된 미국 소설가 저스틴 토레스(45)의 장편소설 ‘암전들'(열린책들) 줄거리다.

이 소설은 실존하는 연구서 ‘성적 변종들’에서 지워진 실제 저자를 다시 채워 넣으려는 가상의 두 성소수자 남성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복원하려는 실제 저자는 독일 출신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퀴어 연구자 잰 게이(1902∼1960)다.

잰 게이는 성소수자 300여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삶과 욕망에 관한 증언을 수집했다. 하지만 레즈비언인 게이는 연구가 완성 단계에 이를수록 차츰 주도권을 잃었고, 결국 그의 연구 결과를 담은 책 ‘성적 변종들’은 연구를 함께했던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인 로버트 디킨슨의 이름으로 출간된다.

잰 게이의 연구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지워지고 성소수자들의 욕망은 장애로 왜곡되어 기록된다. 편견을 무릅쓰고 잰 게이와의 인터뷰에 응했던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온전히 기록될 권리마저 빼앗긴 것이다.

‘암전들’의 원제는 ‘blackouts’이다. 정전, 검열로 인한 삭제, 기억상실 등을 일컫는 ‘블랙아웃’의 복수형이다. 이 같은 제목은 정신질환을 앓으며 온전치 않은 기억을 더듬는 네네, 누군가에 의해 삭제된 잰 게이의 연구, 가려진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암시한다.

후안과 네네는 이처럼 암전된 네네의 기억과 잰 게이의 연구를 복원하려 애쓴다. 두 인물이 성소수자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잃어버린 자신들의 목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도 읽힌다.

‘암전들’은 삭제된 사료를 복원하는 소설 내용에 걸맞게 본문 사이사이에 실제 자료 사진과 삽화가 함께 실렸다. 몇몇 사진은 나체의 인물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어 기이한 인상을 준다.

미국에서 2023년 출간된 ‘암전들’은 크게 호평받으며 그해 전미도서상을 거머쥐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은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허물고 소외된 퀴어 서사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고 평했고, 뉴욕타임스는 “유령처럼 배회하며 이어가는 퀴어 서사의 연결고리”라고 평가했다.

작가 저스틴 토레스는 푸에르토리코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아일랜드계 어머니를 둔 미국인으로 2011년 히스패닉계 혼혈, 빈곤층, 성소수자로서 유년기를 담은 자전적 데뷔 소설 ‘위 디 애니멀스'(We the Animals)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영화로 제작되며 주목받았다.

송섬별 옮김. 416쪽.

jaeh@yna.co.kr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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