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432조·’계약형’ 낮은 수익률에 ‘기금형’ 선택권 확대 필요성
수탁자 신뢰성 확보 관건…노동부, 연구용역서 위험 관리 등 방안 마련
전문가 “모범기준 마련해야”…반대 여론 등 도입까지 장기간 소요 전망
(서울=연합뉴스) 옥성구 기자 = 정부가 회사와 별도의 수탁법인을 설립해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해 수탁법인 책임을 강화하는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기존의 계약형 퇴직연금이 원리금보장형에 집중되다 보니 2%대 낮은 수익률에 머무르는 고질적 문제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영미권에서 보편적인 기금형을 들여와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계획이다.
다만 기금형 퇴직연금에서는 기금을 운용하는 수탁법인의 책임 확보가 중요한데, 국내에는 선례조차 없어 의무와 책임을 규정하는 작업부터 선행돼야 한다. 나아가 거센 반대 여론도 넘어야 해 현실화에는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 퇴직연금 432조…낮은 수익률에 ‘기금형’ 도입 논의
26일 관가 등에 따르면 퇴직연금 관리·감독기관인 고용노동부는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수탁자책임 확보 등을 위한 방안’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퇴직연금을 사업자와 계약을 통해 적립금 운용·관리가 이뤄지는 계약형 구조로 운영된다. 계약형에서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형(DB형)과 가입자 스스로 운용해 성과를 챙기는 확정기여형(DC형)으로 나뉜다.
이와 달리 기금형 퇴직연금은 사용자와 근로자의 규약에 따라 별도 기금운용위원회를 설립하고, 독립된 수탁법인을 만들어 연금자산 운용을 맡기는 구조다. 이는 미국, 호주 등 영미권에서 보편적으로 이뤄지는 퇴직연금 구조다.
기금형 도입이 거론되는 건 계약형의 낮은 수익률이 주된 이유다. ‘퇴직연금 투자백서’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431조7천억원 규모다.
대부분은 원리금보장형에 치중돼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 중에 원리금보장형은 356조5천억원(82.6%)이며, 실적배당형은 75조2천억원(17.4%)이다.
10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2.31%에 불과하다. 연간 수익률이 2021년 2.00%에서 작년 4.77%까지 상승했지만, 원리금보장형에 치중된 탓에 수익률 제고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퇴직연금이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기금형은 전문적인 투자 역량을 갖춘 수탁법인이 근로자의 퇴직금을 통합 운용하고, 그 수익을 가입자에게 배분하는 구조다.
계약형 퇴직연금이 2005년 도입되고 20년이 넘으면서 초기 계약 유치 경쟁을 하던 사업자들이 적립금 운용에 소극적 모습을 보여 경쟁력이 저하됐다는 평가가 많은데, 기금형이 도입되면 시장에서 ‘메기’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감도 있다.
◇ 수탁법인 신뢰성 확보 ‘관건’…제재 조치, 공시 의무 등
기금형 퇴직연금 논의는 2014년부터 2016년, 2019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졌지만, 실제 도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금융권 등의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와 가입자의 선택권 확대 차원에서 기금형 도입에 다시 나섰고, 지난 3월 추진 자문단을 공식 출범했다.
나아가 본격 도입 논의를 위해 수탁자의 책임 강화 방안 마련에도 나섰다. 기금형 도입에서는 근로자의 퇴직금을 운용하는 수탁법인의 신뢰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기금형 퇴직연금은 제3자가 기금을 운용하고 손익이 노사에 귀속되니 수탁자 책임을 살펴봐야 한다”며 “수탁자 책임에 대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명시할지 등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기금형 도입 성공을 위해선 수탁법인의 의무 이행을 확보해야 해 독립적인 지배구조, 위험 관리, 감독체계 등에 대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 연구를 통해 미국·영국·호주 등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국가들의 수탁자 책임 확보 체계를 분석한다는 계획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이 보편적인 미국의 경우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ERISA)에서 수탁자 범위를 정하고 충실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만약 수탁자가 책임 의무를 어기면 형사처벌과 민사소송, 수탁자 지위 박탈 등 제재를 하도록 규정한다.
수탁자 책임을 높이는 내용으로는 이같이 제재 내용을 담은 충실의무 강화뿐만 아니라 공시 의무도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는 운용수익률과 수수료 등 기본적인 내용만 공시하도록 하는데, 이를 강화해 수탁자 책임 범위를 넓히고 가입자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수탁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제재보다는 일부 면책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단기적인 손실을 이유로 수탁자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일정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제재가 가해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먼저 수탁자 책임 확보를 위한 모범 기준을 마련해 도입하면, 판례가 쌓이며 충실의무 등이 정립될 것으로 본다.
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 교수는 “영국 등 기금형 도입 국가에서도 판례에 의해 개념이 정립됐다”며 “현실적으로 볼 때 수탁자 책임 강화를 위한 모범 기준을 마련해 도입하면, 그 이후 판례가 늘면서 정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봐도 퇴직연금을 원리금보장형에만 80% 넘게 넣는 사례는 없다”면서 “이른바 퇴직연금의 ‘갈라파고스화’로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기금형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해서는 거센 반대 여론도 넘어야 해 장기간 논의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권에선 기금형이 도입되면 기존 사업자의 역할 축소 등을 우려해 반발한다. 일부 가입자들은 본인의 노후 자산인 퇴직금을 갖고 기금을 만들어 투자한다는 데 반감을 갖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은 ‘여럿 중 하나’로 옵션을 늘리자는 것”이라며 “가입자들은 더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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