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플러스] 영화 ‘맨홀’, 마음의 어둠을 내려다보다

[N플러스] 영화 ‘맨홀’, 마음의 어둠을 내려다보다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고요히 내려다본다. 깊고 어두운 구멍. 그 안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기억과,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잠들어 있다. ‘맨홀’은 바로 그곳을 들여다보는 한 소년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고(故)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맨홀’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포착한 감각적 스릴 드라마다. 성장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가족의 붕괴, 그리고 존재의 불안을 마주하는 묵직한 질문들이 숨어 있다. 한지수 감독은 원작이 지닌 심리적 결을 감각적인 미장센과 시각적 은유로 풀어내며, 복잡한 정서를 스크린 위에 섬세하게 구현해냈다.

영화 ‘멘홀’ 포스터. 사진=㈜영화사레드피터

‘맨홀’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다. 주인공 선오의 이야기는 결코 격정적으로 울부짖지 않는다. 대신 작은 눈짓, 머뭇거리는 숨결, 바람에 흔들리는 뒷모습 속에 감정을 숨겨둔다. 관객은 그 감정을 좇는 관찰자가 아니라, 마치 맨홀 속으로 함께 내려가는 조심스러운 동행자가 된다.

작품 속 ‘맨홀’은 어린 선오가 폭력을 피해 숨었던 폐공사장의 구멍으로 곧 선오 자신의 내면에 묻어둔 상처의 공간이다.

“맨홀에 아주 중요한 걸 두고 왔어. 같이 가지러 가줄래?”

이 대사 한마디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잊고 싶었던 감정과 기억, 그 가장 깊은 심연으로 다시 내려가는 여정은 곧 성장과 회복의 과정이 된다.

한지수 감독은 빛과 어둠, 침묵과 고백이 교차하는 공간들 속에서 서사를 직조한다. 폐공사장, 학교 복도, 그림자 놀이 같은 장면들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공개된 보도스틸 속 선오의 시선은 불안정한 청춘의 초상, 그 미묘한 흔들림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신예 김준호가 연기한 선오는 작품의 심장이다. 김준호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내는’ 연기를 택했다. 눈빛 하나, 움직임 하나에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스며 있다. 말 대신 침묵으로 감정을 전하고, 관객은 그 조용한 틈 사이에서 혼란과 고통, 그리고 변화의 기운을 읽어낸다.

권소현, 민서, 박미현은 각각 선오의 주변을 채우며 서사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친구, 연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고, 결국 그가 다시 ‘맨홀’이라는 기억의 장소로 향하도록 만든다.

영화 ‘멘홀’ 스틸컷. 사진=㈜영화사레드피터

‘맨홀’의 또 다른 주인공은 ‘공간’이다. 어릴 적 기억이 고여 있는 깊고 어두운 구멍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인물처럼 기능한다. 작품은 그 공간을 통해 관객을 무의식의 층으로 천천히 이끌며, 회피와 직면, 상처와 화해가 공존하는 내면의 풍경을 드러낸다.

한지수 감독은 단편 ‘그건 알아주셔야 됩니다’로 미쟝센 단편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청룡영화상 후보작 ‘기로’, 넷플릭스 기대작 ‘대홍수’의 공동 각본을 거쳐 장편 데뷔작 ‘맨홀’을 선보인다. 한 감독의 연출은 불필요한 설명을 걷어내고, 인물의 감정에 천천히 접근하는 방식이다.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충분한 여백을 남긴다. 특히 공간과 조명의 활용은 인물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작품은 청춘을 이야기하지만, 말투는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다. 요란한 절규 대신, 사려 깊은 침묵과 잔잔한 시선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 덕분에 ‘맨홀’은 단순한 청소년 드라마를 넘어, 성장과 치유,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품은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다가오는 11월, 한국 독립영화계에 또 하나의 귀한 발견이 찾아올 것이다. 심연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관객이라면, ‘맨홀’은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잔상을 남길 것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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