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극단의 정치로 몸살을 앓는 지금,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 불안한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할리우드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그리고 지난 주말 OTT로 공개돼 화제가 된 한국 영화 ‘굿뉴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로 좌우의 유령을 그린다.
두 영화는 다른 땅에서 만들어졌지만 같은 싸움을 기록한다. 좌파 혁명가와 우파 국가권력, 두 세력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결국 같은 본능을 드러낸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다. 이들은 교훈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락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영상 문법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의 허위를 겨눈다.
정치나 좌우 대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피로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두 영화는 각각 액션과 코미디의 외피로 다가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극단의 정치 현실 속에서 이보다 더 유효한 상업 전략은 없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민자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1960년대 흑표범당을 연상시키는 급진단체 ‘프렌치 75’는 자본과 폭력의 회로 안에서 신앙으로 변질된다. 혁명가였던 가장은 체제를 뒤집겠다는 신념 대신 삶의 방향을 잃은 채 딸을 찾아 나선다. 그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빛나던 과거를 되풀이하며 생존하는 낡은 세대의 초상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저항이 상업적 언어로 변질된 시대에 폭력은 신념의 도구가 아니라 생존 제스처가 됨을 보여준다.
굿뉴스는 1970년대 냉전 한복판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일본 좌익 무장단체 적군파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요도호 사건’을 영화적 은유로 차용하는 영화는 사건을 관리하고 조작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풍자한다. 정부는 김포를 평양으로 꾸며 가짜 납치극을 벌인다. 작전은 성공하지만 이를 수행한 개인은 지워진다. 변성현 감독은 국가권력을 거대한 무대로, 정보기관과 군인을 그 무대의 배우로 그린다. 이 블랙코미디는 냉전의 미디어적 본질을 폭로한다.
두 영화 속 좌파 청년들은 여전히 이상을 말하지만 그 언어는 낡았고 그들의 혁명은 또 다른 권위로 변질된다. 반면 우파 중년들은 애국을 외치며 공작을 꾸민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이 진실의 편이라 믿지만 결국 서로 닮아 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극좌 혁명가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고 굿뉴스의 우파 정권은 혁명의 연출을 모방한다. 좌와 우는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며 생존한다. 폭력 기호, 선전 기술, 희생 미학이 거대하고 매혹적인 스펙터클로 전시된다.
두 영화는 현실의 극단 정치를 장르 유니버스 안으로 끌어와 오락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놀랍도록 효과적이다. 관객은 웃고, 긴장하고, 그 속에서 좌우 대립이 결국 같은 회로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앤더슨은 비극의 언어로, 변성현은 희극의 언어로 권력의 스펙터클을 해부한다.
서로 다른 결의 영화지만 둘 다 ‘이념의 종말 이후’를 냉정하게 기록한다. 영화가 다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됐음을 확인하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는 아직 살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