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그릇의 따뜻한 국처럼 남은 영화 ‘사람과 고기’

[리뷰] 한 그릇의 따뜻한 국처럼 남은 영화 ‘사람과 고기’

영화 〈사람과 고기〉스틸컷

【투데이신문 최두진 객원기자】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나면, 오래도록 사람의 얼굴이 남는다. 대사보다 표정이, 사건보다 숨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침묵의 영화가 아니다. 인물들은 실제로 많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다만 그 말들은 사회적 구호나 설명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살아내는 ‘삶의 언어’다. 감독은 그 일상적인 대화 속에 인간 관계의 온기를 담았다. 세상과 자신을 향한 항변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산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덤덤한 울림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더 팬션, 킬 미 등 연출경험 그대로 녹아낸 독립영화

〈사람과 고기〉는 지난 7일 개봉한 양종현 감독의 독립영화로, 주연은 박근형, 예수정, 장용이다. 장르는 드라마, 러닝타임은 106분 19초, 등급은 12세 관람가이며, 트라이베카 영화제(Viewpoints 섹션)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연출한 양감독은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와 단편 작업들의 연출 경험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인물의 감정선은 깊다. 폐지를 줍는 형준(박근형), 길가에서 채소를 파는 화진(예수정), 그리고 떠돌이 시인 출신 우식(장용)은 각자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한 그릇의 소고기뭇국을 함께 나누며 이들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 한 끼의 식사가 서로를 다시 인간으로 느끼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후 우식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무전취식—고깃집에 들어가 고기를 구워 먹고 돈을 내지 않는 행위—을 반복한다. 사회의 규율로 보면 범죄지만, 영화는 그 장면을 ‘살아 있음의 감각 회복’으로 그린다.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이들을 “dine and dash trio”라 표현하며, “맛과 냄새, 불판 위의 연기 속에서 되살아나는 인간의 생명력”이라고 평가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 노트 역시 ‘소고기뭇국의 식탁’이 관계의 핵심 장면임을 강조했다.

양종현 감독은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오래 잡으며 주름, 눈빛, 손의 떨림, 그리고 무심한 시선을 세밀하게 담는다. 반면 세 인물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프레임을 넓게 잡아 배경의 여백을 강조한다. 가까움과 멂의 반복은 인간관계의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음악과 편집은 절제돼 있으며, 정적인 화면은 인물의 호흡을 따라간다. 이 영화가 품은 감정은 격렬하지 않지만, 오래 머무는 진심으로 다가온다.

영화 〈사람과 고기〉스틸컷

고단함 속의 온기, 은퇴세대가 보여준 삶의 품격

〈사람과 고기〉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영화는 말보다 영상이 더 말을 한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지만, 그 말들은 사회적 메시지나 교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버릇 같은 언어다. “오늘 고기가 싸네.” “이건 좀 질기네.” “같이 먹으니까 좋다.” 이런 평범한 말들이 쌓이며 관계가 형성되고, 화면은 그 사이에 피어나는 인간의 온기를 보여준다.

박근형 배우의 낮은 목소리에는 체념이 깃들고, 예수정 배우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친절이 담겨 있다. 장용 배우의 표정은 고단함과 품위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들은 연극적인 과장 없이, 세월의 무게가 묻은 몸짓으로 인물을 완성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감정의 절제 속에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무전취식 장면은 영화의 중심이다. 고깃집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 그리고 세 사람의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은 이들이 왜 이토록 고기를 먹고 싶어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함께 있음’의 상징이다. 돈이 없어도 마음은 나눌 수 있다는, 인간 존재의 본능적 증거다.

영화는 중반 이후 우식의 병과 죽음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우식의 제자가 전한 시집 속 한 편의 시, 〈청춘〉이 영화의 정서를 이끈다.

“목청껏 웃고 싶어서 목놓아 울어본다. 살기도 구찮고 죽기도 구찮다.”

이 시는 인물들의 내면을 대신 말한다. 고단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감독은 이 시를 통해 인물들의 삶과 관객의 마음을 연결한다.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인물의 얼굴을 멀리서 잡으며, 도시의 불빛 사이로 흩어지는 인생의 잔광을 포착한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문장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멸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사람과 고기〉 속 인물들이 바로 그 구절의 증거다. 그들은 가난하고 외롭지만, 여전히 밥을 짓고, 국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

감독은 메시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가진 존엄과 온기를 화면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은 설명이 아니라 ‘느낌’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 〈사람과 고기〉스틸컷

한 그릇의 국으로 시작된 연대

〈사람과 고기〉는 노년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특정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사회, 관계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느낄 외로움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세 배우는 그 감정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한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핵심이다.

한 그릇의 소고기뭇국을 나누며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과정이다. 삶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 아닐까.

〈사람과 고기〉는 작은 이야기지만,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를 가장 따뜻하게 복원한 영화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스크린 속 그들의 눈빛은 오래도록 말을 건넨다.

이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나는 묘하게 따뜻했다. 세상은 여전히 차갑지만, 사람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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