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체인소맨: 레제편’, ‘주술회전: 회옥·옥절’. 최근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나란히 휩쓴 작품들이다. 2025년 국내 극장가의 흐름은 명확하다.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마니아 취향의 장르 계층이 아닌 ‘주류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한때 ‘오타쿠 문화’로 낙인찍혔던 일본 애니는 이제 국내 관객 10명 중 1명 이상이 선택하는 대세 장르가 됐다.
국내에서의 존재감을 새로 쓴 작품은 ‘너의 이름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징이던 시절을 지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서정적 작화와 감성 서사를 담은 작품이 365만 관객을 끌어내며 판을 뒤흔들었다. 당시 대표 OST인 ‘스파클’의 피아노 전주만 흘러도 사람들은 ‘키미노 나마에와(君の名は·너의 이름은)’를 외치곤 했다.
본격적인 전환점은 2021년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다. 스토리·작화의 높은 완성도와 기존 시리즈를 보지 않아도 이해를 돕는 친절한 구성은 ‘거부감 없는 진입’을 열었다. 이후 2023년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잇따라 흥행하며 일본 애니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집혔다. 특히 ‘슬램덩크’는 1990년대 원작을 각색(Reborn)하며 향수와 신세대 팬덤을 동시에 끌어들였다.
2025년은 그야말로 일본 애니의 전성기다. OTT를 통해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팬층이 확장됐고 단발적 관람을 넘어 ‘N차 관람’ 문화까지 정착했다. 최근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누적 관람객 546만 명으로 올해 박스오피스 2위, ‘체인소맨: 레제편’도 221만 명을 기록했다. 두 작품 모두 평균 평점 9점대를 유지하며 팬덤의 충성도를 입증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2023년 기준 시장 규모는 3조3470억 엔(약 31조7871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찍었고 해외 수익이 내수 시장을 초과했다.
퀄리티 상승은 산업의 결실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2D)에 정교한 3D 그래픽을 결합해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무한성편’의 불꽃·물결·번개 효과는 수십 겹의 입자 레이어가 만들어낸 시각적 쾌감이다. 실제 공간을 스캔한 듯한 입체적 카메라 워킹은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몰입감을 구현한다.
콘텐츠 확장 구조 역시 체계적으로 잡혀있다. 하나의 핵심 IP를 중심으로 만화, 애니, 영화, OST, 굿즈로 이어지는 ‘멀티 프랜차이즈’를 구축했다. 팬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스트리밍으로 OST를 듣고 캐릭터 굿즈를 사면서 같은 세계관 안에서의 소비를 반복한다. ‘콘텐츠가 돈을 벌어다 주는 구조’가 아닌 ‘세계관이 소비를 순환시키는 구조’다.
한국에도 IP는 많다. ‘웹툰 강국’이라 불릴 만큼 원작의 저력은 충분하지만 산업의 무게추는 애니메이션화보다 실사화에 치우쳐있다. 이는 ‘우리가 잘하는 걸 하자’라는 보수적 제작 기조가 반영된 결과다. 웹툰 원작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는 ‘쌍천만 흥행’으로 실사화 성공의 대표 사례가 됐지만 이를 뒤이을 흥행 사례는 드물다. ‘좀비딸’도 누적 562만 명을 기록했으나 이 역시 단발성에 불과하다.
웹소설 원작에서 웹툰화된 전지적 독자 시점은 “기존 팬층이 두터운 만큼 예상된 성공이었지만 감독, 각본, 배우 그 누구도 원작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라며 “역대급 원작이 스크린에서는 납작하게 재현됐다”라는 평가받는다.
이 지점에서 실사화와 애니메이션화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축된 세계를 현실로 옮기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한계’다. 만화적 과장과 상징을 배우의 연기나 실제 공간으로 구현하면 세계관은 왜곡되고 어색함만 남는다. 일본은 이 벽을 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매체’로 진화시켰다.
K-콘텐츠가 앞으로 도전해야 할 방향도 여기에 있다. 단발 프로젝트 중심의 제작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의 세계관을 장기적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킬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K-팝, K-드라마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존 성공 공식 안에서만 움직이며 진정한 ‘틀 밖 사고(think outside the box)’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K-콘텐츠의 제자리걸음의 이유는 어쩌면 여전히 ‘현실이라는 박스’ 안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