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어느 날, 17명의 아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한 명의 아이가 있다.
잭 크레거의 신작 ‘웨폰’은 고전 동화의 악몽 같은 풍경에서 출발해, 현대 사회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조용히 파고든다.
장르적으로는 호러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공포를 도구 삼아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에 접근한다. 어른이 되지 못한 사회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외면하는가.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장르의 문법 너머로 확장된다.
새벽 2시 17분. 모두가 잠든 시간에 아이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남은 건, 말이 없는 한 아이. 설명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영화는 실종 자체보다, 그 순간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았다는 정적에 주목한다. 괴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외면과 무관심이 진짜 공포의 실체로 드러난다. 무섭기보다 불편하고, 끝났는데도 계속 마음에 남는 영화. ‘웨폰’은 그런 방식으로 오래도록 지속된다.
잭 크레거 감독은 일상의 리듬을 교란시키는 연출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구조는 정제되어 있고 감정은 억제되어 있으며, 침묵하는 아이와 불안을 억누르는 어른들이 서로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이야기는 미세한 균열을 드러낸다. 공포는 과장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침묵은 오히려 더욱 강렬한 긴장을 만든다.
‘웨폰’의 이야기 구조는 동화적이지만, 교훈을 주기보다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왜 사라졌는가가 아니라,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아이들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시야에서 사라졌는가. 2시 17분은 감시가 멈춘 시간이며, 보호의 시선이 사라진 틈이다. 크레거 감독은 그 틈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이상하게 시작해 더 이상하게 끝나지만 가능한 한 현실에 충실한 영화다.”
‘웨폰’은 공포보다 불안을, 자극보다 침묵을 전면에 내세운다. 관객은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만, 그 실체에 닿기까지는 조용한 긴장과 내면의 공기가 지속된다. 침묵하는 알렉스, 무력한 어른들, 단서가 아닌 시선과 분위기, 그리고 여백으로 채워지는 이야기. 그 모든 공백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아이들의 말을 정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화는 구조와 리듬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시점은 바뀌고, 내러티브는 분절되며, 불쑥 끼어드는 블랙코미디적 감각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숏폼 시대의 감각에 맞춘 전개지만, 서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전은 놀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인식의 재편을 위한 기제다. 모든 구성은 이야기의 본질로 향한다.
미학적으로도 ‘웨폰’은 정교하다. 감정은 과잉되지 않고, 의미는 이미지 속에 스며든다. 아이들의 표정, 대사의 누락, 침묵의 간격, 음향의 절제, 그리고 색감의 기조까지 모든 요소가 하나의 감각적 언어로 기능하며 이야기를 밀어간다. 영화는 말보다 분위기로 말하고, 설명보다 응시로 감정을 전달한다.
결국 ‘웨폰’은 실종된 아이들보다, 그들을 떠나보낸 세계를 응시한다. 보호를 가장한 통제, 관심을 흉내 낸 방관, 책임을 떠넘기는 시스템. 영화는 이 구조적 결핍을 거대한 침묵으로 묘사한다. 결코 소란스럽지 않지만, 조용할수록 더욱 크게 울리는 이야기. 침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소리다.
공포는 이야기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핵심은 기억과 책임,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웨폰’은 장르적 쾌감보다는 감정의 잔상을 남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진다. 왜냐하면 영화가 말하는 진실은 결코 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이곳,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과 맞닿아 있다.
‘웨폰’은 보기 드문 호러 영화다. 장르의 형식을 빌리되, 그 형식을 넘어선다. 스릴러처럼 조이고, 동화처럼 흐리며, 다큐처럼 직시한다. 공포는 종종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잊힘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웨폰’은 스크린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