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에 새 바람이 분다. 승강제는 ‘경기력에 따라 팀이 상·하위 리그로 오르내리는 제도’다. 흔히 ‘스포츠 피라미드’로 불린다. 더 넓고 공정한 경쟁의 장을 열어 리그의 건강한 성장과 지역 균형, 시장 자생력을 키우는 장치다.
한국에서는 승강제의 의미가 더 크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하나의 사다리로 묶어내는 통합 구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2016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 체육회로 합쳐진 것이 통합의 시발점이었다면, 승강제는 그 통합을 실질적인 결실로 완성할 열쇠다.
제도가 안착하면 한국 체육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참여 저변이 넓어지고, 관련 산업과 지역 경제에도 상당한 파급 효과가 기대된다. 아직 재정·인프라·제도 보완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승강제가 한국 체육의 체질 개선과 새판짜기에 있어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데일리는 한국형 승강제가 나아갈 길을 4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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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묀헨글라트바흐=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도시 규모로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데스리가에 있을 수 없는 팀입니다. 하지만 승강제는 실력만 있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분명한 원칙을 정착시켰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1부리그로 끌고 왔습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 속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Borussia Monchengladbach)는 ‘독일 출신의 한국계 태극전사’ 옌스 카스트로프가 활약 중인 팀으로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친숙하다.
묀헨글라트바흐는 1970년대 독일 축구의 황금기를 이끈 팀이다. 1900년 창단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통산 5번 우승을 차지했다. 모두 1970년대에 이룬 성과다. 1974~75시즌과 1978~79시즌에는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를 두 차례나 정복하기도 했다.
1999~2000시즌에는 처음으로 2부리그 강등이라는 충격을 맛봤다. 이후 1부 승격과 2부 강등을 오가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명문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 묀헨글라트바흐 도시를 찾았을 때 첫 인상은 ‘완전 시골인데’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24년 기준 지역 인구가 27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총 면적이 170㎦ 정도로 한국과 비교하면 안산시(146㎦)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인구는 전라남도 여수시나 순천시와 비슷하다.
묀헨글라트바흐는 도시 자체가 큰 특징이 없다. 과거에는 나름 면직물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감자 등 농업을 주력 산업으로 하는 평범한 소도시다. 이 도시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축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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묀헨글라트바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바로 홈구장 보루시아 파르크(Borussia Park)다. 2004년 개장한 보루시아 파르크는 무려 5만4000명이 넘게 들어가는 초대형 경기장이다. 독일 내에서도 손꼽히는 큰 규모다. 단순계산으로 도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수용할 수 있다.
처음엔 ‘도시 규모에 비해 너무 경기장이 큰 것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구단을 취재하면서 그런 생각은 절로 지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보루시아 파르크를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는 2부리그 강등이었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묀헨글라트바흐는 이후 대규모 자본을 앞세운 빅클럽들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큰 도시를 연고로 하는 팀들과 경쟁하기에 힘이 부쳤다.
구단은 높은 수준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재정적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99~2000시즌 2부리그 강등은 특단의 결정을 내리는데 쐐기를 박았다.
묀헨글라트바흐 구단은 시와 협의해 5만 명이 넘게 들어가는 대형 경기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단순히 경기장만 덜렁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경기장 바로 옆에는 대형 호텔이 함께 붙어있다. 호텔에서 경기장까지 거리는 100m도 떨어져있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 온 팬들도 호텔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취재진이 찾은 날은 경기가 없는 트레이닝 데이였다. 하지만 호텔에 묵고 있던 많은 축구팬들이 선수들 연습을 지켜보기 훈련장 스탠드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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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만 있는게 아니다. 경기장 주변에 레스토랑, 펍, 기념품 숍이 자리해있다. 경기장을 조금 벗어나면 더 눈에 휘둥그레진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공공기관과 주요 기업 및 쇼핑센터 등이 눈에 띈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주택단지도 자리해있다. 보루시아 파르크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가 구축되고 있었다. 축구가 지역을 발전시키고, 지역민들을 먹여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묀헨글라트바흐의 시즌 2024~25시즌 홈경기 평균 관중은 5만3104명이다. 경기장 점유율이 98%에 이른다. 경기가 열릴 때마다 티켓 구하기 전쟁이 펼쳐진다. 관중들 상당수는 다른 지역에서 온 팬들이다.
구단이 발표한 2024년 구단 회계 연도기준 총 매출은 약 1억8500만 유로(약 3062억원)다. 구단 관계자는 “한 시즌에 티켓 판매로만 약 6000만 유로(약 993억원)에 매출이 발생한다”며 “경기 외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사회 경제효과를 1억 유로(약 1655억원)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훈련장에서 만난 50대 남성 마이크 판첼레 씨는 “묀헨글라트바흐는 축구에 울고 웃는 도시”라고 말한 뒤 환하게 웃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묀헨글라트바흐 팬이라고 자랑한 그는 “보루시아 파르크가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며 “처음 경기장이 지어졌을때는 호텔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후 호텔도 생기고 새로운 건물과 집들이 많이 생겼다”며 “이젠 구시가지보다 경기장 주변 지역이 더 중심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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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지역은 한 몸아다. 작은 도시에서 지역과 지역민을 잇는 정체성의 뿌리이자 도시를 먹여살리는 사회적 동력이다.
훈련장을 찾은 또다른 남성 팬은 “요즘 지역 분위기가 안좋다”며 “팀 성적이 안좋기 때문이다”고 살짝 귀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훈련장을 찾은 시점에서 팀은 시즌 개막 후 3경기 1무 2패에 그쳤다. 3경기에서 1골도 넣지 못하고 7골을 실점했다. 실제 훈련장을 찾은 몇몇 팬은 다소 험한 말로 선수들을 다그쳤다.
16일 기준으로 묀헨글라트바흐는 6경기에서 3무 3패로 리그 18개 팀 가운데 17위에 머물러있다. 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감독이 경질되기도 했다.
판첼레 씨는 “이 지역은 ‘강등 위기’라는 말이 나오기만 해도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 팀이 2부로 떨어졌을 때는 지역 경제가 반으로 쪼그러들었다는 얘기도 있었다”며 “하지만 다시 승격하면 도시가 다시 축제 분위기로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묀헨글라트바흐를 ‘승강제가 낳은 축구도시의 대표 모델’로 꼽는다. 지역민이 구단을 지키고, 구단이 다시 지역 사회를 끌어올린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축구=도시’라는 공식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축구에서 이룬 성공은 대외적인 지역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지만 강한 도시’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축구팬들이 찾고 싶은 지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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