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시월은 누룩이 익어가는 시절…안동소주 여행

내 고장 시월은 누룩이 익어가는 시절…안동소주 여행

안동 소주 (사진=코레일 관광개발)

[안동(경북)=글·사진 이데일리 이민하 기자] “소주 한잔해.”

낯선 이에게 건네도 어색하지 않은 말이다. 그 한마디에는 위로가 있고 연대가 있다. 한국인의 삶은 그렇게 작은 잔 하나에 담겨 흘렀다. 기쁨의 끝에서, 슬픔의 바닥에서, 우리는 늘 소주 한 잔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나 한국 소주의 불씨가 처음 피어난 곳, 안동의 향은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몽골의 증류 기술이 전해진 13세기 이후 700년, 안동은 ‘소주의 고향’이라 불렸지만 시대는 그 전통을 버리려 했다. 금주령과 양조금지법의 그늘 속에서도 장인들은 불씨를 지켰다. 다시 불을 지피고, 향을 되살리고, 세월의 맛을 잇는 사람들. 안동으로 가는 길은 그 오랜 술의 숨결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금주령과 암흑기 딛고 다시 피운 술의 향

1270년 몽골의 과세가 한반도를 휩쓸던 시절. 충렬왕은 안동에 임시 수도를 세웠고 그때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증류 기술이었다. 불 위에 올린 소줏고리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술은 안동의 혼이 되었다. 조선 시대 ‘나라 안 선비의 절반’이 모여 살던 고장, 안동에서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제사와 손님 접대, 즉 ‘봉제사 접빈객’의 도리 속에서 소주는 가문의 자존심이었다. 술의 향이 곧 집안의 품격이었다.

하지만 그 향은 한국전쟁 앞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로 술을 빚는 행위는 사치로 규정됐다. 공무원들이 종가를 돌며 술 항아리를 깨뜨리던 시절, 수백 년 이어온 가양주는 하루아침에 불법이 됐다. 대부분의 가문이 술을 끊었지만 안동 몇몇 종가만이 제사주를 몰래 이어갔다. 그들이야말로 꺼져가는 불씨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김연박 식품명인과 배경화 국가무형유산 보유자가 방문객과 누룩 배합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이민하 기자)

그 불씨를 다시 밝힌 이는 조옥화 명인이었다. 그는 집안과 시댁의 가양 방법을 모아 수년에 걸쳐 안동소주를 복원했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이자 식품명인으로 그의 술은 손끝으로 기억을 잇고 몸으로 전통을 살렸다. 1980년대 전통주 복원 사업이 활기를 띠자 안동소주는 다시 세상의 빛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상에 오른 순간, 금지되었던 술은 ‘대한민국의 술’로 거듭났다.

조옥화 명인은 2020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술의 맥은 끊기지 않았다. 며느리 배경화 명인이 무형문화재를, 아들 김연박 명인이 식품명인을 이어받았다. 민속주 안동소주 체험관에 들어서면 곰삭은 누룩 냄새가 공기를 채운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 세월의 냄새다. 한쪽에서는 배경화 명인이 누룩틀 위에 올라 반죽을 밟는다. “술맛을 좌우하는 건 누룩이에요. 쉽게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 곁에서 32년을 지키며 술의 비밀을 배웠다. 화학을 전공한 그녀의 지식은 누룩 배합에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냈고 그 배합은 특허청에도 등록됐다. 술 한 잔을 들자, 쌀의 달콤함과 누룩의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오래된 시간이 천천히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호 박재서 명인의 아들인 박찬관 명인안동소주 대표(우측), 손자 박춘우 본부장 (사진=이민하 기자)

◇전통과 기술이 만난 ‘명인안동소주’

안동역에서 차로 20분 남짓. 풍산들의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 끝에 하얀색 현대식 건물이 서 있다. 바로 박재서 명인의 명인안동소주 양조장이다. 전통 양조장이라기보다는 공장에 가깝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대형 증류기가 줄지어 서 있고 로봇이 병을 옮기고 코르크를 막는다. 스크린에는 생산량이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박 명인은 안동소주 양조장 최초로 삼성전자의 ‘스마트 팩토리’ 사업에 참여했다. 설비를 자동화하며 하루 1200병이던 생산량을 2100병으로 늘렸다. 500년 이어온 전통이 산업 기술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박재서 명인의 아들 박찬관 명인안동소주 대표는 “전통도 진화해야죠”라며 웃었다.

그의 아버지 박재서 명인은 상압증류 대신 감압식 증류를 택했다. 물로 간접 가열해 탄내를 줄이고 누룩향을 부드럽게 했다. “전통을 지키되 개선할 건 개선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와 외국인도 마실 수 있어야 하니까요.” 박 명인의 철학이다.

공장 내부는 단순한 생산 공간이 아니다. 유리창 너머로 증류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시음 공간에서는 직접 안동소주를 맛볼 수도 있다. 방문객이 술의 제조 과정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공간이다.

현재는 3대가 함께 양조를 이어가고 있다. 손자 박춘우 본부장은 안동소주 하이볼 체험을 운영하며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힌다. 그는 “할아버지께 하이볼을 타드리면 늘 혼내세요. 그냥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면서요”라며 웃는다. 잔에 얼음을 띄우고 안동소주에 레몬 탄산수를 섞자 묵직한 향과 청량감이 어우러졌다.

박 본부장은 오크통 숙성에도 도전 중이다. 프렌치 오크와 아메리칸 오크 등 다양한 재질의 통에서 숙성된 안동소주는 향과 질감이 모두 다르다. “전통주도 와인처럼 세분화돼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안동소주는 더 젊고 다양해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변화는 더욱 뚜렷하다. 한때 안동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던 술이 온라인 판매로 영역을 넓혔다. 현재 매출의 70%가 온라인에서 발생하고, 구매자의 절반 이상이 2030세대다. 안동소주는 이제 ‘전통의 술’이 아닌 ‘지금의 술’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맹개마을의 3만 평 매밀밭 (사진=이민하 기자)

◇사라진 역사를 다시 빚은 ‘진맥소주’

낙동강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맹개마을’. 강을 건너는 길 끝에 작은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바람이 불면 메밀꽃이 하얗게 일렁이는 들판 속, 진맥소주의 박성호 이사가 서 있다. 그는 원래 IT 사업가였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1540년 안동에서 쓰인 조리서 ‘수운잡방’. 그 책엔 우리나라 최초의 소주 제조법이 기록돼 있었다. 이름은 ‘진맥소주’, 즉 ‘진짜 밀로 만든 술’. 지금의 쌀소주와 달리 소주의 뿌리는 밀에 있었다.

박 이사는 18년 전 사람이 떠난 황무지였던 맹개마을을 사들였다. 아내 김선영 대표와 함께 이곳에 밀을 심었다. 봄이면 초록빛이 번지고, 가을이면 들판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고문헌을 연구하고 누룩 비율을 조정하며 수백 번의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2도에서 53도까지 도수별로 각기 다른 술을 완성했다. 밀의 고소함과 묵직한 단맛이 공존하는 술이었다.

진맥소주를 개발한 맹개마을 박성호 이사 (사진=코레일관광개발)

숙성실 문을 열자 나무와 알코올의 향이 섞인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공기 중 알코올 농도가 2%쯤 돼요. 오래 있으면 취하죠.” 박 이사가 웃었다. 그는 오크 숙성을 통해 진맥소주의 깊이를 더했다. 그 결과 이 술은 뉴욕과 런던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판매창이 열리면 하루 만에 완판될 만큼 진맥소주는 이제 세계 애주가들의 술이 되었다.

박 이사의 꿈은 술에 그치지 않는다. “500년 뒤 저는 사라지겠지만 이 마을과 진맥소주는 남아 있을 겁니다.” 강가의 들판에 서서 그는 미소 지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 햇빛에 반짝였다. 오래된 시간 위로 새로운 시간이 포개지는 풍경이었다. 700년을 이어온 안동소주의 역사 위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그렇게 덧붙여지고 있었다.

코레일관광개발이 운영하는 ‘안동 더 다이닝’ 상품은 10월 24일부터 11월 21일까지 30명 정원으로 4회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코레일관광개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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