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신하연 기자]
“당시 한국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종이접기에 왜 빠져든 걸까요.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여러분의 손에는 무언가 꼭 하나는 남아 있다’는 겁니다. 저 역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우연히 만난 종이접기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세상이 모든 것을 앗아가도 색종이 하나 정도는 남겨준다고요.” 1988년 KBS ‘TV유치원 하나둘셋’에서 ‘코딱지 친구들’이라는 애칭과 함께 ‘종이접기 아저씨’로 불리며 사랑을 받은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은 ‘제14회 이데일리 W페스타’를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전했다. 그는 ‘내 첫 호기심’이라는 주제로 ‘W페스타 콘서트’에서 종이접기 강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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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길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
김 원장은 1980년대 중반 사업 실패로 생활고를 겪다 일본에서 우연히 종이접기를 접했다. 지금도 종이접기를 일컫는 국제용어는 일본어 ‘오리가미’(Origami)로 통용되고 있다. 당시 한국에는 종이접기에 대한 관심이 없어 제대로 된 책자 하나 없었지만 ‘없는 길이라면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해 어느덧 천직이 됐다.
김 원장은 종이접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오감만족’을 꼽았다.
그는 “손으로 색종이를 만질 때 나는 바스락 소리와 색종이 냄새, 알록달록한 색깔 등이 모두 좋다”며 웃음을 보였다.
요즘 인공지능(AI)을 필두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일수록 더 필요한 것도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김 원장은 “(기술의) 발전도 좋지만 그럴수록 아날로그적 생각과 행동, 그리고 휴머니즘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짚었다.
그는 지금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곳이 화장실이든 이부자리든 즉시 색종이와 가위를 꺼낸다. 그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평범하게 보일 납작하고 하얀 종이도 제 눈에는 입체로 보인다”고 말했다. 덕분에 30년 넘게 쌓인 아이디어 메모와 드로잉은 고스란히 그의 자산으로 남게 됐다. 일본에서 종이접기를 처음 접했던 김 원장은 이제는 일본은 물론 미국, 베트남, 몽골, 필리핀,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지에서 종이접기 교육을 진행하며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이 외에도 국내 학교, 기업, 복지시설 등 다양한 공간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종이접기를 가르치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함께 나누는 기쁨이 종이접기 지속하는 원동력”
물론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종이접기를 처음 시작할 때 옆에서 ‘코 묻은 돈이나 버는 일’이라고 비난도 많았다”면서도 “하지만 이상하게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지금 돌아봐도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20년 가까이 방송에 출연하며 매주 5개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중복되는 아이템을 선보이는 게 싫어서 20년 가까이 매주 다섯 개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우울증과 목 디스크까지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김 원장은 “예·체능보다는 국·영·수 중심, 대학 진학 중심의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이 종이접기를 접할 기회 자체가 여전히 많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면서도 “각 지역에 종이접기 공방과 강사들이 생기는 건 평생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강연장에서 여전히 종이접기 아저씨로 통하는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다.
어린 시절 TV로 종이접기 아저씨를 보던 세대가 이제는 어른이 돼 강연장을 찾는다. 김 원장은 “사회생활을 수년 한 어른도 내 앞에서는 ‘코딱지’가 된다”며 웃었다. 그는 “코딱지라고 더 불러달라”는 학부모들도 있다. ‘누구 엄마’나 ‘무슨 과장’ 대신 이름을 오랜만에 들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코딱지’들도 있다”며 “이런 경험들이 종이접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김 원장의 메시지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삶의 철학으로 확장된다. 그는 “요즘 젊은 세대가 제약이 많아 힘들다. 그래도 자신만의 색종이는 반드시 남는다”며 위로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