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 창건일이다.
노동당은 북한을 통치하는 유일 집권 정당(1당 지배 체제)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한국의 경우 현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국민의힘’, ‘조국혁신당’ 등 여러 당이 존재하지만, 북한은 ‘노동당’ 뿐이라는 것. 공식 명칭은 ‘조선로동당’이다.
특히 올해는 당 창건 80주년이다. 5년, 10년 주기의 정주년(꺾어지는 해)을 중시하는 북한에게 올해는 더 특별하다. 불과 한 달여 전,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맞아 베이징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러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 위상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우푸틴 좌정은’이 연출되면서 첫 다자외교 무대에 나선 김 위원장의 존재감과 자신감이 그야말로 하늘로 치솟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이 자리에서만큼은 북한의 발목을 잡아온 국제사회의 제재나 고질적인 경제난, 인권 유린국이라는 비난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북한은 당 창건 80주년을 기념해 이미 대규모 열병식을 예고했다. 성공적인 방중 후 금의환향한 만큼 김 위원장은 국제사회를 향해 보란듯이 자신과 북한 체제를 어필할 것으로 예상된다.
10일 야간에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열병식에는 각종 최신 무기들도 등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이후 러시아가 북한이 원하는 일부 군사 기술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어떤 새로운 무기들이 어떻게, 얼마나 공개될지 여부도 큰 관심사다.
앞서 한국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2일 북한이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 열병식을 준비 중이며 10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단체조도 5년 만에 다시 선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에게 ‘당 창건 기념일’이란?
북한에게 10월 10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체제의 존재 이유이자 통치 이념의 근간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명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특히 이날은 김씨 일가의 ‘혁명 전통’ 계승의 의미를 지닌다. 북한이 그토록 강조하는 ‘유일지도체제’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은 물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의 혁명 영도 역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노동당은 통치의 핵심 원천으로, 당 창건일은 김정은 위원장의 절대적 권한이 당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유일지도체제를 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는 핵심적인 날이기도 하다.
조한범 한국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BBC에 “특히 올해 당 창건 80주년은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의 시대를 본격화하는 의미가 있다”고 진단했다. 당 창건 70주년은 김정은 집권 초기로,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조 연구위원은 때문에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을 자신의 업적을 최대한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를 위해 최대 규모의 열병식은 물론 외국 사절단 역시 가능한 많이 초청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국국방연구원 출신의 김진무 숙명여대 교수는 “북한은 당 국가 체제로, 당이 사실상 지배 조직이자 통치 조직이기 때문에 당이 잘 살아야 북한 체제가 잘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과거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 당 조직이 무너지는 바람에 북한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
그는 “이후 북한이 당 세포 대회를 여러 번 했다”면서 “당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은 체제 안정의 기본인 만큼 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관련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중러 연대 재연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
북한은 이미 올해 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을 예고했다. 그리고 이번 열병식에서의 관건은 역시나 북중러 3각 연대의 재연이다.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중국에서는 리창 국무원 총리가 9일 각각 평양에 도착했다. 양국 모두 전보다 격을 높여 소위 ‘2인자’를 파견했다.
지난달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북중러 정상이 천안문 망루에 나란히 올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김정은 위원장을 중심으로 중러의 2인자들이 함께 평양 김일성광장 주석단에서 비슷한 모습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이러한 북중러 3국의 연대 대오가 단순히 ‘헤쳐모여’가 아닌 ‘진정한 협력’의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센터장은 “실제 중러 2인자들이 참석한 만큼, 공동선언 없는 북중러 안보협력이 실제적으로 본 궤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막이 열린 것으로 재확인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야 북중러 연대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국제사회, 특히 미국에 과시할 수 있는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설명인데 특히 ‘안보경중'(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에 의미가 있다고 두 센터장은 강조했다.
군사안보적으로는 이미 북러 밀착이 가속화되고 있고, 지난달 3일 중국 전승절을 기점으로 북중 교역이 활성화되고 북한 경제가 살아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내년 1월로 예상되는 9차 당 대회에서 주민들에게 ‘면’이 선다는 것.
따라서 제9차 당대회는 북한의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대내외 정책 노선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두 센터장은 아울러 “이번 당 창건일을 통해 북한의 전략적 지위는 굉장히 공고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러시아 파병과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전승절 참석을 통해 전략적 지위는 이미 확인이 됐다”며 “이것이 단발성,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및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또다시 대내외적으로 과시한다면 이번 열병식을 계기로 북한 내부 결집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다만 “상징성에 비해 성과는 크지 않다”면서 “북한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런 보여주기식 행사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연말까지는 계속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한국 군 당국은 북한이 10일 야간에 열병식을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2020년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부터 최근 7번의 열병식을 모두 야간에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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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은 곧 무력 시위로, 북중러 3국이 공식적으로 반미 대열을 강화하는 자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진무 교수는 “북한이나 중국 모두 열병식을 할 때마다 신무기들이 등장했다”며 “지난달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중국이 미국 보란듯이 최신 무기들을 다 드러내지 않았나, 이게 바로 무력 시위”라고 강조했다. 북중러 세 나라가 연대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공식 자리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AI 및 무인 전투 시스템을 비롯해 미국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5세대 스텔스 전투기 등을 선보였는데 재래식 무기나 핵무기로 미국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AI 시스템에 집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지난달 대규모 열병식에서 공개한 최첨단 무기로는 페이훙-97 무인 항공기와 AJX002 무인 수중 드론, 4족 보행 지상 무인 로봇, 사거리 15000km 이상의 둥펑-61 대륙간탄도미사일, 잉지-21 극초음속 미사일, 젠-20 스텔스 전투기 등이 있다.
김 교수는 이어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의 이러한 최첨단 무기들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만큼 조바심이 날 것”이라며 “북한 역시 대외적으로 미국과 한국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대규모 무력 시위를 선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북중러 3국 연대가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김건 의원(국민의힘)은 최근 북중러 3국이 연대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현재 중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외교적 목표는 ‘미중 관계 안정화’라고 말했다. 북중러 협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전승절 80주년 당시 북중러 세 정상이 모이기는 했지만 회담이나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며 “북한은 계속 신냉전 구도를 만들려고 했지만 중국이 반대했는데 이는 중국의 목표가 미중 관계를 안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중국이 원하는 것은 신냉전을 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미중 관계를 안정시켜서 중국의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자꾸 북중러 반미 연대로 보여지고 신냉전이 오는 것처럼 언급되면 결국 중국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10월 10일이 아니다?
북한 노동당은 헌법 위에 군림한다.
이는 당의 규약과 유일사상체계가 실질적으로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뜻하는데 실제 북한에서는 헌법보다 당의 지시가 우선시되며 당 규약과 김일성-김정일의 교시가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된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역시 ‘조선노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역사 속 공산당이 공식 설립된 날짜는 1945년 10월 13일로 알려져 있다. 두 달 뒤인 12월 18일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됐고 이듬해인 1946년 소련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과 결을 같이 하는 ‘북조선신민당’이 설립됐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결합해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역사 속 그 어디에도 ’10월 10일’은 없다. 북한이 당 창건일로 10월 10일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1958년부터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공화국’ 창건 기념일로 내세우는 1948년 9월 9일 역시 당 창건일과 마찬가지로 그 어디에도 없는 날짜가 툭 튀어나온 경우다. 소련의 지시 아래 1948년 4월 28일 북조선인민회의 임시헌법이행, 3개월여 후인 7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 결정(정권 수립의 의미를 따졌을 때 이 날이 가장 비슷한 날로 여겨진다) 그리고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 등이 눈에 띄지만, 9월 9일은 없다.
북한연구소장을 지낸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이러한 ‘역사 지우기’는 북한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그들 사회에서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
이어 “구구절(9월 9일)이나 쌍십절(10월 10일)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해 상징적으로 필요한 형태로 역사를 조작한 것으로, 북한과 같은 체제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일 일”이라며 “정통성 강화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자리매김 해왔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