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정부는 아동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예방 및 치료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침을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임신부의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의 브랜드명) 복용이 자폐증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폐증 유행”이라 부르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와 함께 이같이 발표했다.
미 행정부의 이번 권고안에는 자폐 아동의 언어 발달 장애 치료를 위해 엽산 계열 약물인 류코보린을 사용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날(22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류코보린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증상 완화에 잠재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해당 약품의 라벨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미 보건복지부는 성명을 통해 “류코보린이 자폐증 치료제인 것은 아니”며, “언어 관련 문제에만 일부 효과를 보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 자폐 과학 재단’은 성명을 통해 “결론을 내리기 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며, 류코보린을 자폐 치료제로 권고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원인은 밝혀졌나?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부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에 합류한 이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주요 과제로 삼으며, 미국 내 자폐 증가율에 관해 이미 반박된 이론들을 옹호해왔다. 올해 4월에는 5개월 이내에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대규모 검사 및 연구”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폐의 직접적인 원인을 규명하기란 절대 쉽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단일한 발병 원인은 없다는 것이다.
‘자폐증 과학 재단’의 수석 과학자인 앨리시아 할러데이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전적 요인이 매우 크다는 점은 쌍둥이 및 가족 구성원을 직접 연구한 연구를 통해 확실히 알려져 있다”고 했다.
영국의 ‘국립 자폐증 협회’ 또한 미국 정부의 이번 발표 이후 성명을 통해 “자폐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단일 원인은 없으며, 유전적 요인이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폐 원인을 찾는 과정은 오랫동안 잘못된 정보로 얼룩져 왔다. 1998년, 현재는 의사 면허가 박탈된 영국의 앤드루 웨이크필드가 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MMR) 백신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거짓으로 연결 지은 잘못된 연구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한 음모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케네디 장관 역시 2023년 미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자폐증은 백신에서 비롯된다”는 거짓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자폐의 ‘치료제’가 있나?
자폐 스펙트럼에 속하는 많은 이들에게 자폐를 “고쳐야 한다”는 믿음은 ‘신경다양성’ 운동 및 사람마다 정신적으로 지닌 자연스러운 차이를 존중하자는 생각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편견을 강화한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수 플레처-왓슨 발달심리학 교수는 “자폐는 반드시 검사를 해야 하고, 단정적으로 결과나 예후를 도출해야 하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플레처-왓슨 박사는 지난 4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폐는 마치 암처럼 모두가 나쁘다는 데 동의하고 반드시 치료하길 원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서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국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두 자녀를 키우는 스테파니 한라한은 자폐는 질병이 아니기에 치료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라한은 “우리 아이들은 자폐이거나, 비자폐이거나 선택할 수 없다”면서 “(자폐는) 아이들이 이 세상과 자신의 아름다운 삶을 바라보는 렌즈”라고 표현했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임상연구원인 에드 멀린스 박사는 자폐는 ‘스펙트럼’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마다 경험 및 치료에 대한 생각이 다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멀린스 박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자폐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 전부가 이를 치료해야 할 장애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내가 만나본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자폐가 부모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곤 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자폐 증상을 잠재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대안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류코보린’이란 무엇이며, 자폐를 치료할 수 있나?
류코보린은 비타민 B9의 합성 형태인 폴릭산(엽산, 폴레이트를 합성한 형태)의 제제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폴레이트는 뇌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족할 경우 선천적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인체는 콩류, 감귤류, 강화 곡물 등의 식품으로부터 엽산을 섭취할 수 있다.
‘자폐증 과학 재단’은 임신 초기에 낮은 엽산 수치가 자폐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가 존재하긴 하나, 일관되지는 않다고 밝혔다.
또한 자폐 아동의 일부 증상 개선에 엽산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원래 암 치료제로 개발된 ‘류코보린’ 임상시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일반 엽산과 달리 류코보린은 혈뇌장벽을 쉽게 통과해 비타민 B9 결핍을 보완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와 관련하여 4건의 무작위 임상 시험이 진행되었는데, 각각 용량도, 효과 검증 방식도 달랐다.
일례로 2016년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에서는 자폐 아동 48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위약군보다 언어적 의사소통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해당 연구의 연구진 또한 표본 크기가 너무 작다고 인정하며,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근거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으며,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해당 약물의 안전성과 장기적 효과에 대한 데이터도 아직 부족한 상태다.
치료가 아닌 지원이 필요한 차이?
한편 한라한 가족에게 자폐를 유행병으로 규정짓는 것은 자폐를 둘러싼 사회적 낙인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한라한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행병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대상, 억제하고 근절해야 하는 대상”이라면서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한 삶은 이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한라한은 자폐의 원인이나 치료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실제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원하는 일은 이 담론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기 개입과 테라피 프로그램, 보호자의 돌봄 부담 경감 등의 방식으로 지원해야 할 (개인 간) 차이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