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시간)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열병식에서는 중국의 군사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 워싱턴 D.C.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주목했다.
폴란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중 언론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내가 보기를 바랐을 것이고, 나는 보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천안문 광장에 펼쳐진 대규모 열병식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생각은 밝히진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트럼프와 전 세계에 전한 메시지는 상당히 분명해 보인다. 지금 세상에는 새로운 권력 중심지, 즉 지난 세기 미국이 주도해 온 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3일 백악관에서 열린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이 같은 발언은 이 사안에 대해 뚜렷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했다.
최근 며칠간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빙빙 도는 생각 끝에 내놓은 이 발언 속에는 애매모호함, 불만, 우려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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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무심한 듯 보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지도자를 포함해 20여 개국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질 중국의 군사력 과시에 대해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밤, 트럼프 대통령은 SNS ‘트루스 소셜’을 통해 중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기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당신들은 미국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푸틴과 김정은에게 내 따뜻한 안부를 전해 달라”고 비꼬았다.
한편 반미 음모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 퍼레이드 및 군사력 과시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온 인물이다.
지난달 알래스카에서도 스텔스 폭격기의 공중분열식 및 미군 전투기들이 늘어선 레드카펫으로 푸틴 대통령을 맞이했다. 첫 대통령 임기 중 참석했던 프랑스 ‘바스티유 데이’ 기념식도 좋은 기억으로 여기는 듯하다.
아울러 불과 2달 전에는 미 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직접 주최하기도 했다.
중국이 선보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군인들의 행진 및 최첨단 무기 퍼레이드와는 달리, 트럼프 대통령의 행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시대 전차가 등장하고 독립혁명 당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백악관 근처 컨스티튜션 대로를 자유롭게 행진했다. 미국 군사 역사에 소박하게 경의를 표하는 자리에 가까웠던 셈이다.
본질적으로 이는 향수를 자극하는 행사로,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지향적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구호 및 19세기 중상주의에 기반한 그의 경제 정책과도 맞닿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종종 그 시절이야말로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각종 미래형 무기를 선보이긴 했으나, 이번 중국의 열병식 또한 역사적 서사를 담고 있었다. 공산당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 자신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듯했다.
이 세계 대전이 이른바 “미국의 세기”를 열었다면, 이제 중국은 당시 전쟁에서 자신들의 기여도를 높게 재평가함으로써 자국이 설계한 미래로의 전환이 정당화될 수 있길 바라는 듯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미 보훈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윌키는 “이는 국제 질서의 규칙을 다시 쓰려는 노력의 첫걸음”이라면서 “그리고 그 첫 단계가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아시아 내 일본의 패배에는 중국 공산당보다는 중국 민족주의 세력과 미군이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 주 중국에서 펼쳐진 장면 가운데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미국 정책 당국자들을 우려하게 만든 것은 열병식만이 아니었다.
지난 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를 통해 한자리에 모였다.
특히 두 국가를 강하게 겨냥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등으로 인해 얼어붙었던 인도와 중국의 관계가 상당 부분 좋아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듯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식 무역 정책은 전 세계 경제 및 정치 구도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눈에 띄는 중국-러시아-인도 정상 간 유대는 지정학적 퍼즐의 굵직한 조각들이 복잡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맞춰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란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연방 정부의 새로운 세수를 마련하는 계획의 핵심 요소이다. 이에 외교적 대가가 따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당분간은 이를 감수할 의지가 있는 듯하다.
트럼프 행정부와 가까운 싱크탱크인 ‘아메리카 퍼스트 외교정책 연구소’에서 ‘미국 안보 위원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윌키 전 장관은 “한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당국 (또한) 진짜 위협은 미국과의 무역 파트너십에서 발생하는 작은 마찰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서 “진정한 위협은 성장하는 중국의 군사력”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영토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심한 태도를 보여왔다. 대신 그린란드, 파나마, 캐나다 등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 대한 “영향권”에 더 집중한다.
그러나 그의 전방위적인 무역 조치가 결국 위험만 크고 실익은 없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존재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새롭게 구축한 미국 중심의 무역 체제가 앞으로 미국 사법부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신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미 항소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연방법을 잘못 해석한 데 근거했다고 판결했다.
트럼프 대통령 측은 이에 불복하며 연방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보수 성향의 판사가 다수를 차지한 연방대법원이 종종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이나, 의회의 명시적 승인 없이 대통령이 대규모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즉 연방대법원이 대통령 권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폭넓은 해석을 지지하리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역 문제에 있어 트럼프는 대통령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에 미국을 전례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고, 몇 달 만에 몇몇 국가들을 서로 뭉치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야심 찬 전략을 통해 미국이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할 것이라 공언한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에서 펼쳐진 열병식이든, 미국 법정이든, 그 앞에 놓인 위험은 매우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