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박수남 기자] 북극항로는 단순한 상업 항로가 아니다. 이곳은 러시아, 중국, 미국 등 강대국들의 패권이 충돌하는 ‘얼음 위의 그레이트 게임’의 새로운 무대다. 주권, 군사, 자원의 생명줄로 여기며 항로의 배타적 통제권을 노리는 러시아, ‘빙상 실크로드’를 통해 에너지 안보와 말라카 딜레마 탈출을 꿈꾸는 중국, 그리고 이들의 팽창을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항행의 자유’를 내세워 군사적, 외교적 견제에 나선 미국. 평화와 협력의 공간이었던 북극은 신냉전의 최전선으로 변모했다. 2부에서는 북극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야망과 그 충돌이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를 파헤친다.
얼음 위의 체스판,
강대국들의 그레이트 게임
북극항로를 둘러싼 담론이 경제성과 환경 문제를 넘어설 때, 그 본질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얼음 위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on Ice)’이다. 강대국들에게 북극항로는 단순한 상업 항로가 아니라, 21세기 지정학적 패권을 다투는 새로운 체스판이다. 한때 과학 협력과 평화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북극 예외주의(Arctic Exceptionalism)’는 녹아내리는 빙하와 함께 사라지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변화에 결정타를 날렸고, 북극은 이제 NATO와 러시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신냉전의 최전선으로 변모했다. 이 거대한 게임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중견국은 순진한 상업적 기대를 넘어, 냉혹한 지정학의 법칙을 직시해야만 한다.
러시아의 북방 제국 – 주권, 군사, 그리고 자원의 길
러시아에게 북극항로는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안이다. 푸틴 대통령이 2020년 승인한 ‘2035 북극 개발 및 국가안보 전략’은 그 야망을 명확히 보여준다. 러시아는 북극항로를 국제법상의 자유로운 통항이 보장되는 국제 해협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내부 수로’로 간주하며, 외국 선박에 대해 자국법에 따른 통항 규칙과 강제 도선, 그리고 원자력 쇄빙선의 에스코트를 강요한다. 이는 항로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명백한 주권적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주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다. 러시아는 냉전 시대에 폐쇄했던 북극 연안의 군사 기지들을 재가동하고, 최신예 극초음속 미사일과 방공 시스템을 배치하며 북극의 군사화를 주도하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수의 원자력 쇄빙선단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쇄빙선과 항만 인프라는 민간 수송 지원과 군사 작전 수행이 모두 가능한 ‘이중용도(dual-use)’ 자산이다. 이는 북방 함대의 작전 반경을 보장하고, 유사시 북극항로를 완벽히 통제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북극항로는 러시아의 자원줄이다. 시베리아 북부 야말 반도의 막대한 천연가스(LNG)와 북극 대륙붕에 매장된 석유, 광물 자원을 해외 시장으로 실어 나르는 거의 유일한 출구다. 즉, 북극항로는 러시아의 주권, 군사안보, 경제적 미래가 결합된 국가 전략의 핵심축(linchpin)인 셈이다.
중국의 ‘빙상 실크로드’ – 용의 북극 진출
북극에 영토가 없는 중국은 스스로를 ‘근북극 국가(Near-Arctic State)’로 칭하며 이 새로운 게임에 뛰어들었다. 2018년 발표한 ‘북극정책백서’는 ‘빙상 실크로드(Polar Silk Road)’라는 야심 찬 구상을 통해 북극에 대한 자국의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는 전략적 선언이다.
중국의 목표는 다층적이다.
첫째, 에너지 안보다.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주로 러시아와 협력하여 북극의 석유, 가스, 광물 자원 개발에 참여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려 한다.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 중국 자본이 대거 투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전략적 통로 확보다. 현재 중국의 대유럽 교역로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야 하는 ‘말라카 딜레마’에 처해있다. 빙상 실크로드는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대체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중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높여준다.
셋째, 국제적 영향력 확대다. 중국은 과학 연구, 기지 건설, 쇄빙선 건조 등을 통해 북극 거버넌스에서 ‘규칙 수용자’가 아닌 ‘규칙 제정자’로 발돋움하려 한다.
현재 북극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편의상의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에 공동으로 맞선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지만, 그 기저에는 장기적인 경쟁 구도와 긴장 관계가 잠재되어 있다. 러시아는 중국의 자본을 필요로 하지만, 자국의 뒷마당인 북극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다.
깨어나는 거인 – 미국의 안보 중심 대응
과거 북극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군사화와 중국의 부상에 직면하며 정책 기조를 급격히 전환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변화는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안보 우선주의’로 명확히 굳어졌다. 2022년 발표된 ‘북극 지역 국가 전략’은 러시아와 중국을 명시적인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의 전략은 러시아, 중국과 결이 다르다. 상업적 활용이나 자원 개발보다는 안보적 대응에 압도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첫째, 러시아와 중국의 활동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군사 대비 태세를 강화하는 것이다.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확충하고 미사일 방어 체계를 현대화하고 있다.
둘째, ‘항행의 자유’ 원칙을 내세워 북극항로를 자국 내 수로로 간주하는 러시아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미 해군 함정이 사전 통보 없이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펼칠 경우, 이는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인화점이다.
셋째, NATO 동맹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덴마크, 캐나다 등 북극권 NATO 회원국들과의 연합 훈련 및 정보 공유를 통해 러시아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다만 미국은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바로 ‘쇄빙선 격차(Icebreaker Gap)’다. 수십 척의 쇄빙선, 특히 원자력 쇄빙선을 보유한 러시아에 비해 미국은 노후화된 쇄빙선 몇 척을 보유하는 데 그쳐, 북극에서 지속적인 물리적 존재감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이 쇄빙선 건조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이처럼 북극은 더 이상 평화로운 협력의 장이 아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언제든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정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현실은 북극항로의 상업적, 과학적 활용을 꿈꾸는 대한민국과 같은 중견국에 심각한 함의를 던진다. 우리의 경제적 야망이 강대국들의 안보 논리에 휘말려 좌초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경제적 관점만으로 북극에 접근하는 것은 이 위험한 게임의 본질을 외면하는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