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글로벌 반도체 장비제조 업계에서 ‘양극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요 업체 10곳 중 절반인 5곳이 올해 2분기(4~6월·일부 5~7월) 실적이 둔화했다. 지난해 일제히 호조세를 보였던 것과 대비된다. 인공지능(AI) 및 중국의 장비 수요 변화, 미중 무역 규제 등이 시장 변화를 촉발하며, 업계 재편이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반도체 장비 업계, AI 특수·中수요 둔화에 ‘명암’
18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 등에 따르면 도쿄일렉트론·스크린(SCREEN)·테라다인·디스코·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ASML·ASMI·KLA·램리서치·어드밴테스트 등 글로벌 10대 반도체 장비제조 업체들의 순이익은 총 94억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40% 증가했다. 이는 5분기 연속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개별 업체별로 들여다보면 절반인 5개사가 올해 2분기 실적이 줄어들거나 성장이 둔화했다. 10개사의 시가총액 합산액도 9100억달러로 지난해 7월 고점 대비 20% 감소했다.
미국 램리서치는 순이익이 전년 동기대비 69% 급증했다. 증가폭이 지난해 같은 기간 27%에서 대폭 확대했다. AI 데이터 고속 처리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및 AI 연산용 첨단 로직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며, 이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성막 장비(막을 입히는 장비)와 에칭 장비(패턴을 깎는 장비)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미국 KLA의 순이익 증가율은 지난해 2분기 22%에서 올해 2분기 44%로 확대했다. 반도체 칩과 기판을 연결해 정보 처리 속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인 ‘첨단 패키징’용 검사·측정장치 수요가 늘어난 덕분이다.
지난해 2분기 순이익이 19% 감소했던 네덜란드 ASML는 올해 2분기 45% 증가로 돌아섰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첨단 공정 장비 매출이 올해 2분기 기준 55억 4100만유로로 전분기대비 40.8% 증가한 영향이다. 이외에도 네덜란드 ASMI와 일본 어드밴테스트의 순이익 증가폭이 각각 5%→27%, 160%→280%로 확대했다.
반면 일본 도쿄일렉트론과 스크린의 순이익은 작년 2분기 각각 96%, 93% 증가했으나, 올해 2분기엔 두 회사 모두 7%, 8% 감소했다. 미국 테라다인도 같은 기간 55% 증가에서 58% 감소로 전환했다. 미국 AMAT(9%→4%), 일본 디스코(87%→0.2%)의 경우 순이익이 감소로 돌아서진 않았으나, 그 증가세가 눈에 띠게 둔화했다.
닛케이는 “실적이 둔화 또는 악화한 기업 수가 작년 1분기(1~3월) 이후 5분기 만에 가장 많았다”며 “중국 수요 일시적 둔화, AI 특수로 특정 장비에 대한 수요 집중, 경쟁 심화, 기술 격차 축소, 미중 무역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
◇中업체들과 경쟁 격화도 영향…“기술 격차 좁혀져”
AI 특수 수혜 기업·품목에 대한 ‘선별적 성장’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닛케이는 도쿄일렉트론·스크린·테라다인의 실적이 악화한 것은 그래픽처리장치(GPU) 테스트장비 시장에서 경쟁사인 어드밴테스트에 크게 밀린 탓이라고 짚었다.
아울러 중국 현지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경계해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지난해 장비 입수를 서둘렀다. 그 결과 올해는 수요가 크게 줄었고, 10개사 중 9개사의 중국 매출 비중이 1년 전 40%에서 최근 30%로 축소했다. 도쿄일렉트론은 “현지 신생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가 예상보다 저조했다”고 설명했다.
전기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현지 장비제조 업체들과의 경쟁도 심화했다. 중국 정부는 이들 업체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며 자립을 꾀하고 있다. 지난해 장비 투자액만 350억달러에 달한다. 스크린의 고토 마사토 사장은 “메모리나 파워 반도체용을 중심으로 중국 현지 공급업체에 힘을 쏟고 있다. 앞으로 기술 격차가 점점 좁혀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 전망은 나쁜 편이 아니다. AMAT를 제외한 미국·네덜란드 5개사는 올해 하반기에도 AI·첨단 공정 투자 특수에 힘입어 실적 개선을 낙관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관세 도입 및 대중 AI 반도체 수출 규제 등 정책 변수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AI 특수’ 대(對) ‘민간·범용시장 침체’의 이중적 산업 트렌드는 반도체 장비제조 업계뿐 아니라 칩 제조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모바일·가전·PC·전기차 등 민간 부문에서 판매량·순이익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이에 엔비디아·TSMC 등은 2분기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한 반면, 삼성전자·인텔 등은 실적이 악화했다. 일부 대형 칩 제조사들은 투자 계획을 전면 재조정하는 등 신중한 접근으로 전략을 바꾸기도 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AI 반도체 투자가 향후 2~3년간 장비업계 성장도 이끌 것”이라면서도 AI·첨단 공정 수요에 힘입은 ‘선별적 성장’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민간수요 감소, 경기 둔화, 기술격차 축소, 미중 수출입 규제, 지정학적 변수 등으로 시장 양극화 및 구조 재편이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