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시 본 로빈 윌리엄스의 ‘굿 윌 헌팅’— “네 잘못이 아니야”가 남긴 것

[리뷰] 다시 본 로빈 윌리엄스의 ‘굿 윌 헌팅’— “네 잘못이 아니야”가 남긴 것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지난 11일은 세계적인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를 떠올리며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을 다시 보았다. 이 작품은 추억의 영화가 아니라 오늘의 선택을 점검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문장이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까지 도달하는 드문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이다.

영화 속 윌 헌팅은 MIT의 칠판 앞이 아니라, 술집과 골목, 법정과 상담실을 건너며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의 뛰어난 지능을 뽐내지 않는다. 대신 지능을 방어막으로 쓰는 습관, 먼저 세상을 베고 보는 태도를 천천히 벗겨 낸다.

여기서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의 방법이 눈에 들어온다. 숀은 논리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경청하고, 반복해 확언하고, 충분히 기다리는 태도로 벽을 허문다. 트라우마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연결하는 잘못된 회로라면, 반복된 확언은 그 회로를 우회해 마음에 닿는다. 윌이 버티다 무너져 숀을 껴안는 순간, 관객의 마음속에서도 오래 돌아가던 ‘내 탓’ 기계가 잠시 멈춘다. 이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장엄한 연출이 아니라 확언의 윤리에 있다.

우정에 대한 영화의 태도도 분명하다. 윌의 절친 처키는 천재 친구의 재능 앞에서 질투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 집 문을 두드렸는데 네가 없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은 진짜 우정의 얼굴을 드러낸다. 붙잡지 않고 떠날 권리를 축복하는 용기가 우정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명료하게 보여 주기 어렵다. 그래서 결말의 무언의 떠남은 배신이 아니라 완성으로 읽힌다. 나를 떠나도 좋으니, 네 자리에서 살아 달라는 진심이 그 짧은 부재(不在)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지식에 관한 통찰도 선명하다. 하버드의 바 장면에서 윌은 교과서 문장을 베껴 외는 허영을 가볍게 무너뜨린다. 그러나 영화가 남기는 핵심은 재치가 아니다. 남의 생각을 쓰면 출처를 밝히고, 내 생각을 말하면 책임을 지는 태도가 지식의 품격이라는 선언이다. 이후 윌은 지식을 사람을 해부하는 칼로 쓰지 않고, 사람을 연결하는 언어로 되돌린다. 문제를 빨리 푸는 능력보다 사유하는 자세와 예의가 왜 더 멀리 가는지, 영화는 설명 대신 장면으로 보여 준다.

교수 램보와 숀의 대비는 ‘재능의 속도’와 ‘치유의 속도’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묻는다. 램보의 말, “여기서 썩히기엔 아깝다”는 논리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문제 해결 능력만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상처는 속도를 늦추고, 때로 그 느림이 생존의 기술이 된다. 램보가 성과의 시간표를 들이댈수록 윌의 방어는 거칠어지고, 숀은 시간을 비워 두며 기다린다. 영화의 리듬은 이 간극에서 탄생한다. 마지막의 결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명령이 아니라 설득으로 완성되는 성장이다.

결말은 흔히 로맨스로 기억되지만, 본질은 자기결정의 선언이다. 윌은 명성과 연봉을 뒤로하고 서부로 향한다. “그 여자 보러 가야겠다(see about a girl)”라는 메모는 즉흥이 아니다. 그를 묶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 공포를 알아차리고도 한 걸음 내딛는 행위가 곧 성숙이라 할 수 있다. 숀의 마지막 한마디—“젠장, 내 대사를 훔쳐 갔군”—은 그 자유를 축복하는 미소처럼 남는다. 좋은 스승이 제자의 떠남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의 최종 형태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처키의 미소 또한 같다. 붙잡지 않고 밀어 주는 우정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으로 질문이 옮겨 온다. 우리는 오래도록 “좋은 데 취직해라”라는 문장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 성실을 폄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정의를 조금 고쳐 쓸 필요는 있다. 좋은 회사란 간판이나 급여가 아니라, 내가 낸 아이디어가 동료들과 함께 실현되는 곳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상관없다. 젊음은 도전의 시간이며, 도전은 종종 안정의 좌표를 떠나는 책임 있는 결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라. 돈이 많든 적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의 다른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로빈 윌리엄스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의 유산은 빠른 기지나 많은 목소리보다 먼저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수성에 있었다. 그는 웃음으로 타인의 두려움을 덜어 주는 법을 아는 배우였다. 말년의 질환은 그의 인지와 정서를 동시에 흔들었지만, 우리는 그의 죽음을 단순한 ‘우울’로 축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그를 기리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과장된 미화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과 존중의 언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의 핵심은 아마도 이 한 문장일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굿 윌 헌팅>
은 1997년 보스턴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질문은 지금도 현재형이다. 상처를 다루는 태도, 지식의 품격, 우정의 윤리, 그리고 후회하지 않겠다는 선택. 이 네 갈래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정교하게 맞물릴 때, 고전은 개인의 삶에 조용히 개입하는 힘을 얻는다.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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