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켄은 아흔 번째 생일에 죽기로 했다

[책]켄은 아흔 번째 생일에 죽기로 했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아흔 살 생일을 이제 막 맞은 켄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임종의 순간만큼은 단정한 차림을 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짧고 뾰족한 백발 턱수염을 다듬고, 깨끗하게 다려진 면바지를 챙겨 입었다. 올리브색 드레스셔츠 위로 빨간 스카프도 둘렀다. 항상 신던 낡은 체크무늬 실내화 대신 코가 길쭉한 가죽 정장 구두로도 갈아 신었다.

오전 11시 52분. 켄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와인 잔에 담긴 걸쭉한 유백색 약물(세코날)을 단숨에 들이켰다. 스피커에선 이 순간을 위해 직접 선곡한 ‘이건 블루스가 아니야’(Nothin‘ about the Blues)가 흘러나왔다.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작사·작곡·연주한 곡으로, 켄은 자신의 묘비명처럼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낮 12시8분. 의사 마틴이 입을 열었다. “임종하셨습니다.”

켄이 눈감은 오리건주는 1997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조력사망이 합법화한 곳이다. 미국에서 조력 사망은 보통 6개월 이하 시한부 진단을 받은 환자만 신청할 수 있으며, 본인이 직접 죽음에 이르는 약물을 삼켜야 한다. 루게릭병이나 치매 등 만성 퇴행성 질환 환자는 조력 사망이 불가하다.

책은 수년간 조력 사망 현장에서 써낸 죽음과 인간의 존엄에 관한 밀도 깊은 탐구서다. 문화인류학자인 저자가 말기환자와 가족,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을 직접 만나며 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고뇌와 선택, 연대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삶을 끝내려는 이들이 마주하는 법적·경제적·문화적 제약을 추적하면서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력 사망에 대한 찬반논쟁은 뜨겁다. 웰 다잉(well-dying)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는 지금, 책의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그렇다고 ‘좋은 죽음’(good death)이 현대인의 또 다른 의무로 둔갑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는 “성급한 우리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고통에 간편하고 기계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싶다”며 “조력사망이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여력 있고 선택받은 소수 사람들만의 사치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썼다.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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