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깽 노예 노동’ 메리다 곳곳에 기념탑·박물관·’제물포’ 명판
독립군 양성 숭무학교 터 표지판 추가 예정…일부 시설은 관리 필요해 보여
(메리다[멕시코 유카탄]=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국제사회에서 멕시코 동부 유카탄반도는 마야 문명 주요 유적인 치첸이트사(Chichen Itza)와 지하수 침식으로 생긴 거대 천연 우물인 세노테(Cenote) 같은 관광지로 유명세를 얻은 곳이다.
공룡의 대량 멸종을 촉발한 것으로 알려진 거대 운석 충돌구(칙술루브·Chicxulub)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한반도 9배 면적(197만㎢)의 멕시코에서 멕시코시티를 비롯한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도 ‘평생 한 번은 방문하고 싶은 지역’으로 꼽힌다는 유카탄은 우리에겐 특별한 의미를 하나 더 갖는다.
120년 전인 1905년 한인 1천31명이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발을 내디딘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부족한 먹거리로 곤궁에 빠졌던 선조들은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는 광고 문구로 근로자 모집을 독려하는 사탕발림에 속아 ‘묵서가'(墨西哥·멕시코를 뜻하는 한자어)에 도착했다.
유카탄 프로그레소항에서 한인들은 10∼25명씩 무리로 나뉘어 메리다의 에네켄(‘애니깽’) 농장에 배치됐다. 에네켄은 날카로운 잎을 가진 선인장의 일종으로, 당시 수요가 많았던 선박용 로프의 원재료였다.
한인들은 오전 4시부터 일몰 때까지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는데, 광고와 달리 마치 노예와 같은 혹독한 노동 환경에 내몰린 것도 모자라 임금까지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 신문 기사, 후손 증언, 전문가 연구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4년 계약 만료 뒤 곧바로 마주한 ‘망국’의 현실 앞에서 돌아갈 곳조차 막막해진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은 쿠바로 재이주하거나 멕시코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인원이 현재의 유카탄주(州) 메리다에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념해 멕시코 연방정부, 유카탄 주정부, 메리다 시정부는 한인 첫 이민자들의 멕시코 도착일인 5월 4일을 ‘한국 이민자의 날’ 또는 ‘한국의 날’로 지정한 바 있다.
메리다에서는 한인 이민자와 관련한 시설물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낮 체감온도 40도를 오르내리는 12일(현지시간) 찾은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탑은 그중에 하나다.
메리다 시내와 프로그레소 항구 사이 유카탄 세무서 건물 바로 앞에 자리한 이 기념탑은 이름 그대로 2005년 이민 100주년을 기리며 세워졌다.
8.5m 높이 기념탑 맨 위에는 에네켄 잎을 상징하는 철제 구조물이 올려져 있고, 탑 인근 안내비에는 ‘1905년에 한인들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멕시코에 왔다’는 취지의 글이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이 탑은 수년 전 관리 부실을 지적받은 바 있는데, 이날 확인했을 때도 일부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석재 이탈로 철골을 일부 드러낸 에네켄 상징 장식이나 기둥 부위 일부 균열은 개선 여지가 있었고, 지지대 틈에 자란 잡초 역시 꾸준히 살펴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관리 소재가 명확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로 여겨진다. 애초 탑 관리 주체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였으나, 사업회 해산 이후론 개·보수 등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계획 수립이나 절차 마련 등이 여의찮은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다 북동쪽에서 알타브리사 주택 단지 7번 도로인 ‘대한민국로'(Avenida Republica de Corea)를 따라 한국 유영호 작가의 조각 ‘그리팅맨'(Greeting man·인사하는 사람)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면 ‘제물포’ 거리도 쉽게 찾을 수 있다.
120년 전 이주한 한인들은 한국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밟았던 땅(제물포항)을 매우 그리워했다고 한다.
2007년 인천과 메리다는 이를 계기로 자매결연을 했고, 제물포 거리 코너에 있는 한 건물 외벽에 ‘El Chemulpo'(엘 제물포) 명판과 ‘제물포(인천) 거리’ 안내판을 부착했다.
여기에서 차로 15분가량 이동하면 초록색 외벽의 한인이민사박물관에 닿는다.
박물관 건물은 1935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으로 사용되다가 한동안 가정집으로 쓰였다.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초창기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흑백 사진이나 신문 기사, 신분증, 편지, 각종 서류 등이 전시된 이 박물관은 “한인 후손에겐 더없이 소중한 곳”이라고 ‘한인 이민 3세대’ 돌로레스 가르시아(64·한국 이름 김민서) 박물관장은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100여년 전 독립군 양성 군사훈련 기관이었던 멕시코 숭무학교 군사 훈련 터(현 산베니토 도매 시장)에는 기념 표지판과 안내판이 설치될 예정이다.
해당 표지판 등을 한국에서 자비로 제작해 전날 현지 당국에 기증한 정갑환 씨(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 상임대표)는 “메리다를 찾는 후손들이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wald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