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심청엔 `효녀`도 `용궁 로맨스`도 없다

21세기 심청엔 `효녀`도 `용궁 로맨스`도 없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착한 딸’ 효녀 심청, ‘딸 바보’ 심봉사는 없다. 용궁에서 새 생명을 얻고, 왕을 만나 신분 상승하는 ‘해피엔딩’도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판소리 고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심청’이 온다. 원작의 노랫말은 살리되, 서사와 인물을 오늘의 시선으로 비틀어낸 듣도 보도 못한 심청과 심봉사 이야기다.

‘효녀’라는 막을 걷어낸, 21세기형 ‘심청’이 이달 13~14일 전북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초연한 뒤, 9월 3~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극본과 연출을 맡은 요나 김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심청이 용궁에서 돌아와 왕비가 되는 동화적인 ‘용궁 로맨스’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판소리 ‘심청가’는 유교의 효와 권선징악을 담고 있지만, 이번 작품은 그 이면에 내재한 사람들의 맹목(盲目)을 들여다보는 여정”이라며 “심청이 남성의 권력에 기대어 행복을 찾는 식의 결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극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의 연습 장면. 심봉사 역의 김준수가 오열하고 있다.(사진=국립극장).

◇157명 출연 대작…K창극 탄생하나

국립극장이 전주세계소리축제위원회와 공동제작한 ‘심청’은 2년 가까이 공들인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단원을 포함해 총 157명이 무대에 오르는 대형 프로젝트이자, 유럽에서 활동해온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이 한국 전통 판소리에 처음 도전한 화제작이다. 그는 지난 20년간 ‘카르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등 30여 편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2020년 독일 권위의 예술상인 파우스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엔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를 연출해 호평받은 바 있다.

이번 ‘심청’은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스타일로 재해석한 공연이다. 독일어 연출(Regie)과 극장(Theater)이 결합한 용어로, 원작 대본을 충실히 재현하기 보다는, 연출가의 해석을 더 중시하는 무대예술 방식을 일컫는다. 요나 김도 ‘창극 심청’ 대신 ‘판소리 씨어터 심청’이라고 정의했다.

작창과 음악감독은 창극 ‘리어’ 등 국립창극단 대표작에 참여해온 한승석이 맡았다. 판소리가 지닌 본연의 매력과 현악기, 타악기 등 각종 악기가 더해져 묵직한 감동을 만든다. 유은선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전무후무한 심청이 될 것”이라며 “고전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요나 김(사진=국립극장)

◇“맹목·탐욕·자기연민…우린 모두 눈먼 존재”

이번 ‘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효녀’와는 거리가 멀다. 유교적 가치관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이유에서부터 하이힐을 신은 뺑덕어멈의 등장도 눈길을 끈다. 심청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을 대변한다.

심청 역을 맡은 소리꾼 김율희는 “‘심청가’를 배우면서도 그저 착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1차원적인 심청에 항상 의구심이 있었다”며 “심청이 죽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그간 갖고 있던 불편함과 궁금증을 이번 ‘심청’을 통해 표출할 수 있어 흥미롭다”고 말했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김율희는 국립창극단 소속 김우정과 함께 더블캐스팅됐다.

심봉사 역은 국립창극단 간판스타인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번갈아 맡는다. 김준수는 “작품 속 모든 인물이 저마다 업보를 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심봉사는 눈을 뜨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유태평양도 “원전의 심봉사는 딸만 생각하는 순수한 철부지 캐릭터였다면, 이번 작품에선 무기력하고 자기 일에 몰두한 나머지 딸을 돌보지 못하는 아버지로 그려진다”고 설명했다.

연출가 요나 김은 “모두가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눈먼 존재들”이라며 “심청은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맹목에, 뺑덕은 탐욕에, 심봉사는 자기 연민에 눈이 멀어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권선징악은 전 세계 설화와 동화의 기본 구조이자 인류 보편의 감정이지만, 현대 사회에선 인간의 감정과 관계, 세계관이 훨씬 더 복잡하다”면서 “파격을 위한 파격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이미 내재한 깊이와 너비를 탐구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의 연습 장면(사진=국립극장 제공).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의 연습 현장 장면(사진=국립극장 제공).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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