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 최근 미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제안한 조선 협력 패키지 ‘마스가’(MASGA) 프로젝트 중 군산항에 미국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기지를 조성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실효성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먼저 한국 정부에 구축함과 순양함, 잠수함 등 전투함을 포함하는 미 해군 MRO 전용 기지 조성이 가능한 서해권 항만을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고 최종적으로 군산항이 선정됐다고 국내 한 인터넷매체가 지난달 2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자체 검토 결과 군산항을 미 해군 MRO 기지로 조성하는 안을 확정한 후 정부는 지난달 말 미국에서 열린 관세 협상에서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마스가 프로젝트를 미국 측에 제시했다.
미국의 이같은 요청은 중국 해군의 팽창 견제와 동·남중국해의 해상루트 차단 목적에서 비롯됐으며 군산항 7부두 일대라는 구체적인 사업 대상지도 공개됐다. 이 매체는 전북도와 군산시가 해당 부지에 추진 중인 ‘특수목적선 선진화 단지 조성 사업’과 연계·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3일 후 지역 매체를 중심으로 일부 언론에서 비슷한 내용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시장, 업계에서도 MRO 기지 조성의 가부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해 보면 군산항 미 해군 MRO 기지 조성안은 지난달 30일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 부각된 마스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장에서 제공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사업 대상지로 거론된 군산항 7부두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까지 연계돼 실현 시 최근 국내 주요 조선사의 새로운 타깃으로 부상 중인 미 해군 MRO에 있어 HD현대중공업이 ‘반사효과’를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2010년 3월 준공된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는 180만㎡ 규모로 25만톤급 초대형 선박 4척의 동시 건조가 가능한 도크 1개와 1650톤급 골리앗트레인 등의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극심한 수주 절벽으로 2017년 7월 조업을 중단했다가 2022년 10월부터 재가동에 들어갔다. 현재 선박 신조는 하지 않고 블록 제작만 하고 있다.
조선업계와 증권가에서는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유휴 도크 활용 가능성을 놓고 미 해군 MRO 기지와 연계했을 때의 효과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쪽은 군산조선소가 위치한 군산항이 미 해군 입장에서 전략적 이점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MRO 기지 조성을 통해 중국 해군의 동·남중국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해군 함정 MRO 시장이 연간 20조원으로 추정되며 인도-태평양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미 7함대의 MRO 물량 적체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7함대의 수요와 국내 조선소와의 연계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군산 MRO 기지 조성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재 약 50척의 함정을 운용하고 있는 7함대는 2028년까지 총 22척 이상이 정비 대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군산항 MRO 기지 조성은 지정학적·지형적 한계에 직면해 있고 인프라 부족 등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군산항의 입지 특성인 중국과의 가까운 거리는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군산과 중국 산둥반도와의 거리는 400km가 채 되지 않는다.
김용민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군산항에 MRO 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실효성이 다소 제한적이라 판단한다”며 “새로운 MRO 기지를 건설할 만큼 수요가 보장되지 않았고 중국 본토와 가까워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서해안은 중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전반적으로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김 연구원은 이어 “중국 측의 큰 반발 예상은 차치하더라도 군산 북서쪽에 위치한 보하이만은 중국 군함 건조의 중심지”라며 “군산은 미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덧붙였다.
군산항의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는 점도 단점으로 지목된다. 동해가 주 항로인 미 해군 함정이 오가기에 군산은 동선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도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구조가 MRO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수석연구원은 “HD현대에서 군산조선소를 신조 생산시설로 조성했기 때문에 해당 조선소를 MRO 사업에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며 “운영 주체에서 관심이 적은 데다 신조 조선소에서 MRO를 하는 것 역시 비(非)효율적이며 적용되는 기술도 상이하다”고 말했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전문위원도 “군산조선소 도크는 케이프 사이즈(벌크선 중 가장 큰 선형) 선박 건조에 최적화된 구조”라며 “MRO 수행 시 도크뿐 아니라 안벽(배를 접안시킬 목적으로 만든 시설) 작업에도 많은 기간이 소요되는데 군산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크면 안벽 작업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부족한 배후 인프라도 문제다. 해군 MRO 사업을 위해서는 함정을 정비하는 동안 승조원, 지원 임무 등을 수행하는 미군 등이 머무를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군산은 부산, 울산은 물론 거제와 비교해도 이러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미 해군 전투함의 MRO 예산 집행 범위가 확대될 경우 군산조선소의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김 연구원은 “향후 미 해군의 MRO 집행예산 중 OPN(Other Procurement, Navy) 부문이 해외 조선소에 개방돼 ‘전투함’에 대한 국내 조선사들의 수주가 가능해질 경우 신규 도크 수요는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유휴 도크 활용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전투함 MRO 수요와 관련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조선사들은 미 군함 건조·수리를 해외에 맡기지 못하도록 규정한 미국 ‘반스-톨레프슨법 수정법’으로 현재 군수지원함 등 비전투함 MRO만 맡고 있다”며 “전투함 MRO 수주를 위해서는 미국의 현행 법령 개정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법이 개정돼도 미 해군의 전략 자산이 사실상 ‘현존하는 가장 큰 위협’인 중국에 매우 인접한 군산에서의 수리로 이어질지 여부는 향후 더 지켜봐야 할 사안”이라고 전했다.
이은창 전문위원은 “울산, 경남 등 타 지역 조선소에서 소화가 안 될 정도의 충분하고 장기적인 MRO 수주 물량이 확보되는 등 조건이 전제가 돼야 군산항 MRO 기지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HD현대는 “군산 MRO 기지와 관련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의 하나로 제안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전북도, 군산시 등 지자체에서 관심을 더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마스가 프로젝트와의 연계 여부도 현재로선 공유해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