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한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
캔버스에 스며든 광채, 음악의 반짝이는 선율, 영화와 책에 담긴 눈부신 서사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각자의 일상에서 그러모은 빛의 아름다운 면면.
스기모토 히로시 SUGIMOTO HIROSHI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Koyanagi
어떤 사진을 마주할 때면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던 바로 그 순간을 단번에 상상해보게 된다.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스기모토 히로시의 연작 ‘극장들(Theaters)’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랬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극장 안,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얀 섬광. 작가는 어느 날 문득 한 편의 영화를 한 장의 사진으로 촬영한다는 가정을 해본다.
이를 실험하기 위해 1976년부터 유럽과 미국의 오래된 극장들을 찾아가 같은 방식, 같은 구도로 영화가 상영되는 전 과정을 장노출로 기록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셔터를 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셔터를 닫았다. 초당 24 프레임.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스크린을 스쳐간 프레임의 수는 10만 장을 거뜬히 넘긴다. 그렇게 수많은 장면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이토록 명료하고도 새하얀 빛이라니. 이야기의 총합은 결국 한 줄기 빛으로 응축될 수 있다는 걸, 그 빛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새롭게 태어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걸 사진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션 베이커 <아노라>
작년 겨울의 끝자락, <아노라>를 보고 눈가와 코끝이 퉁퉁 부은 채로 상영관을 걸어 나오던 날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누군가를 쉽게 믿는 마음 때문에 번번이 깨지고 아파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지겨워 그저 축축하고 어두운 곳으로 은신하고 싶었던 날들. 그렇게 숨어든 극장에서 <아노라>를 봤다. 뉴욕의 한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스트리퍼 ‘아노라’와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철부지 남자애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이야기라고, 어리둥절한 채로 시작했다 끝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노라>가 자기만의 빛을 따라가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 느꼈다. 둘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건장한 남성 3명과 대치하며 아노라가 온몸으로 저항하는 장면에서, 스크린을 뚫고 나오던 그의 맹렬함과 기세에서 빛을 보았다.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 같은 건 세상에 없고, 끝내 지독한 현실에 발 디딘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아이처럼 우는 아노라를 보며 생각했다. 빛, 밝음, 고귀함. 아노라라는 이름이 말하듯,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그 자체로 빛이 난다고.
이제니 산문집 <새벽과 음악>
“빛들이 몰려온다. 붉은빛, 푸른빛 혹은 둥글고 각진 빛들이. 급박하고도 느린. 느리고도 급박한 호흡으로. 살아 있는 맥동처럼. (…) 의미의 세계를 초월하여 몸으로 바로 육박해 들어온다. 당신은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당신의 고유한 울림을 들으라고 말한다.”
이제니의 산문집 <새벽과 음악>에서 빛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풍경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와 “무언가를 말하라고, 말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재촉하고 독촉하”는 존재다. 빛의 부추김을 받은 그는 언어의 무게에 짓눌린 채로, 밀려오는 통증을 견디면서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읽는 내내 페이지 곳곳에 그가 남긴 빛의 단상들을 쓸어 담아 반짝이는 것들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고 싶었다. 젊은 날의 우리가 마음껏 낭비할 수 있었던 것.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감각하게” 하는 것. 삶의 저편으로 떠나간 이의 부재를 문득 실감하게 하는 것. 나의 자리에서 너의 자리로 건너가게 만드는 것. 빛이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마지막 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막스 리히터 ‘On the Nature of Daylight’
사방이 차단된 암실의 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한 줄기의 미세한 빛이 아주 서서히 들어오는 순간을 선율로 옮기면 이런 곡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독일계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는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전쟁과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아 앨범 <The Blue Notebooks>를 완성했다. 어둠과 혼돈으로 뒤덮인 전시 상황에서 리히터가 떠올린 건 한낮의 빛이 품은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였다. 최소한의 음악적 재료만으로 한낮의 빛을 상상하며 만든 것으로 낮게 깔린 첼로 현이 일정한 코드를 반복하며 곡의 기반을 이루고, 그 위에 바이올린 선율이 점진적으로 더해진다. 단순한 음계가 미세하게 반복되고 변주되는 이 곡을 듣다 보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일렁임을, 점차 퍼져나가는 빛의 흐름을 눈으로 그려보게 된다. 이 곡이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은 건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오후의 빛을 하나쯤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