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주기 별 역할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젊었을 땐 열심히 일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나이 든 후에는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나이 든 부모가 성인이 된 자식을 부양하며 경제 활동을 이어가고 반대로 자녀는 하릴없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불황으로 인한 경력직 선호, 청년 구직자들의 대기업 쏠림, 고령화로 인한 퇴직연령 상승 등 여러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로 분석됐다.
취업 못 하고 집에서 노는 20·30 청년들, 물·불 안 가리고 돈 버는 50·60 부모들
청년세대 첫 취업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올해 3월 국가통계연구원이 발간한 ‘생애과정 이행에 대한 코호트별 비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첫 취업 시기는 ▲1975~1979년생 22.12세 ▲1980~1984년생 22.72세 ▲1985~1989년생은 23.4세 ▲1990~1994년생 23.36세 등이었다. 전체 청년을 대상으로 집계한 결과로 대상을 4년제 대졸자로 한정하면 첫 취업 시기는 더욱 늦어졌다. 휴학 없이 쭉 4년제 대학교를 다닌다고 가정하면 ▲1975~1979년생 26.12세 ▲1980~1984년생 26.72세 ▲1985~1989년생은 27.4세 ▲1990~1994년생 27.36세 등으로 추산됐다. 우리나라 청년세대 중 대졸자 비중은 70% 안팎 수준이다.
주목되는 점은 이마저도 취업을 가정한 통계라는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에 실패하거나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그냥 쉬는’ 청년들도 빠르게 늘고 있다. 통계청이 24일 발표한 ‘2025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청년층(15~29세) 인구는 797만4000명이다. 이들 중 최종학교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인 청년은 약 121만명에 달했다. 7명 중 1명 수준이다. 심지어 1년 이상 미취업 상태인 청년도 56만5000명이나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들, 이른바 ‘캥거루족’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청년패널조사로 본 2030 캥거루족의 현황 및 특징’ 보고서에 따르면 25~34세 청년 세대 캥거루족 비율은 2012년 62.8%에서 2020년 66%로 늘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창 효도를 받았을 나이에 성인이 된 자녀를 부양하는 부모세대가 많아 졌다는 의미다.
반면 부모세대의 경제활동은 청년세대 보다 활발한 편이다. 통계청 고용동향에 따르면 연령대 별 고용률은 15~29세가 44.8%인 반면 50~59세는 76.5%에 달했다. 60세 이상 역시 42.3%로 청년세대와 거의 비슷했다. 대기업 임직원 비중 역시 중·장년층이 청년층을 앞질렀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국내 주요 124개 기업의 지난해 30세 미만 인력 비중은 19.8%, 50세 이상은 20.1% 등이었다. 신입사원이나 대리급 직원 수가 차장·부장 직원 숫자보다 적은 셈이다.
부모·자녀 부양에 본인 노후 못 챙기는 50·60세대, ‘캥거루족’ 자녀는 인생설계 포기
문제는 생애주기 별 역할의 경계를 허무는 ‘캥거루족’의 증가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부모세대와 청년세대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수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캥거루족이 늘어날 경우 부모세대 입장에선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함에 있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시간·비용적 노력을 노후 대신 자녀에게 투입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지난해 우리금융그룹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은퇴를 앞둔 X세대(1970년대생) 중 노후 준비를 하고 있는 비중은 39.3%에 불과했고 이들 중 대부분(85.3%)은 자녀나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2023년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가 발표한 자료에서도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8~1974년) 중 80%가 가족을 부양 중이었다. 이들 중 노후의 현금흐름이 될 수 있는 임대와 연금, 이자, 배당소득이 준비되지 않은 응답자는 39%나 됐다. 자산 1분위(하위20%)는 부채비율도 상당했다.
황광훈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은 “부모세대 입장에서 캥거루족 자녀는 노후설계에 가장 치명적인 요인이다”며 “노동시장 은퇴 시기가 다가오는 중요한 시점에 자녀의 경제적 기반을 위해 시간적·비용적 노력을 투입하다 보니 정작 자신들의 노후설계와 준비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청년세대가 겪는 부작용은 더욱 심각하다. 나이가 들수록 노동시장 진입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탓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발표 자료에 따르면 나이는 비슷한데 사회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고 결국 취업에 실패해 다시 캥거루족으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또 독립적인 생활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결혼이나 출산도 늦추거나 포기할 확률도 높아진다. 동시에 남들과 현저히 다른 현실에서 오는 불안감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등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확률도 높다.
대학 졸업 후 올해로 4년째 취업준비에만 매진하고 있다는 김주형 씨(31·남·가명)는 “대학 졸업 할 때만 해도 한 1년 정도만 준비하면 남들처럼 취업하고 독립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며 “취업에 실패하다 보니 부모님 집에 살면서 계속해서 손을 벌리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인생계획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요즘엔 ‘인생 실패자가 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어 불안해서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캥거루족’이 늘어나는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의 불안정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며 “이는 생애주기별 역할 경계를 흐리게 하면서 부모세대의 노후 설계에도 심각한 부담을 초래한다”고 진단했다. 이어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자립 기반을 마련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주거 안정, 일자리 연계, 재정 교육 등 다방면에서 제도적 개입이 이뤄져야 청년과 부모세대 모두의 삶의 질을 함께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