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의 책꽂이 ⑭] 오유균 시집 ‘플랜B’

[김정수의 책꽂이 ⑭] 오유균 시집 ‘플랜B’

 

시집 한 줄 평

필사의 힘으로 살아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깊고도 깊은 체념의 기록이다.”

시 한 편

<구멍> – 오유균

못이 빠졌다, 숨통이 트였다

 

물고 있던 입구가 찌그러져 있다

 

정년이 지났다

 

망치 잡을 이유가 없어졌다

 

물고 견뎌야 하는 질문이 없어졌다

 

질문이 없어지고부터 입을 잃었다

 

검고 깊은 이빨 자국에 대해

 

이제, 할 말도

 

못할 말도 없어졌다

 

시평

직장에서 직원이 퇴직하도록 정해져 있는 나이가 정년이다. 건강에 문제가 없어도, 늙어 죽는 순간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없는 건 다 정년 때문이다. 정년의 나이에 이르면 홀가분함과 불안감이 교차한다. 오랜 직장 생활로 누적된 피로와 지친 심신에 휴식을 줄 수 있지만, 고정 수입이 사라져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여생을 즐길 수 있으니, 정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반대라면 노후는 궁핍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근원은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이다. 단순히 소득 차이의 문제만이 아닌 분배의 불균형이나 대물림, 기회 불평등으로 인한 부의 쏠림에 기인한다. 부의 축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점점 작아지는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한다. 정년이 달가울 리 없다. 한데 정년이 지났다는 시인은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직장 생활은 이고, 정년은 그 못이 빠지는 일이라 한다. 직장은 못이 박혀 있던 자리이고, “못을 물고 있던 입구는 찌그러져 있다”. ‘일 수도 있다. 목이 빠지는, 달아나는 일 말이다. 그렇다면 정년은 목이 메는 일이 아닐까. 의미상으로는 시인의 정년퇴직으로 직장에 타격이 있는 것 같지만, 이는 역설적 표현이다. 직원 한 사람이 퇴직한다 해서 직장에 타격이 있을 리 없다. 시인은 다시 직장에서 하는 일을 망치를 잡는 것에 비유한다. 실제로 망치를 사용하는 직업이라는 뜻은 아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거나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일일 수 있다. 시인에게 직장 생활은 물고 견디는 행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고 싶지만,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한다. 못이 빠진 구멍에 검고 깊은 이빨 자국선명하다. 어쩌면 가장의 존재 이유는 가족의 부양일지 모른다. 정년 이후 경제적 능력이 상실되면 가정에서도 한직이다. 대화조차 사라진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기죽어 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권한을 내려놓은 힘없는 가장의 자화상이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Author: NEWS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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