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한미 양국이 지난달 31일 자동차·철강·반도체 장비 등 주요 품목의 대미 수출 관세를 15% 수준으로 조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궤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자동차·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대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무관세 혜택이 사실상 종료됨에 따라, 수출 충격을 흡수할 정책적 대응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역대급 한미 금리차가 통화 완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FTA 혜택 상실…車·반도체 타격 현실화
표면상 관세 인하로 보이지만, 이번 합의는 한미 FTA의 핵심이었던 무관세 체제의 사실상 종료를 의미한다. 한국은 미국의 고율 관세(25%)를 15% 수준으로 낮추는 데 합의했지만, 이는 기존 FTA 무관세와 비교하면 실질적인 관세 부과다.
특히 일본(2.5%) 등 FTA 미체결국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세율이 적용되며, 오히려 역차별 구조가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차증권은 “현대·기아차는 세율 1%포인트당 약 1500억 원의 이익 감소가 발생할 수 있으며, 반도체는 연간 수출의 약 1.2% 손실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관세 충격은 단순한 가격 경쟁력 하락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 고용과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어, 이에 대한 통화·재정정책의 복합적 대응이 요구된다.
◇금리 인하, ‘가능성’보다 ‘조건’이 중요해졌다
수출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금리 인하가 필요하지만, 한은의 선택지는 넉넉지 않다. 한미 기준금리 차는 2.00%포인트로 역대 최대 수준이며,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할 경우 그 격차는 2.25%포인트로 벌어진다. 이는 외화 유출과 환율 불안, 수입물가 상승 등 연쇄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금리 인하를 미루면 수출 둔화와 실물경제 수축이 방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폭’이 아닌 ‘조건’ 중심의 금리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외환보유액, 환율 방어 여력, 투자심리 관리 수단 등 금리 인하의 전제가 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질 경우, 한은은 제한적이나마 금리 인하를 단행할 수 있는 전략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한 전직 금통위원은 “금리 인하는 경기 부양의 불가피한 수단이지만, 외환위기 리스크로 이어져선 안 된다”며 “환율 방어 능력과 미국 연준의 정책 방향이 금리 인하의 ‘타이밍’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격경쟁력의 한계…‘구조경쟁력’ 중심 정책 전환 시급
이번 통상 재편은 한국 수출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FTA 무관세 혜택이 사라진 상황에서, 금리 인하를 통한 원화 약세만으로는 수출 경쟁력을 되살릴 수 없다. 관세 인상 충격을 환율로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가격 중심의 정책 기조에서, 구조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산업정책과의 병렬 운용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정책금융·무역보험·세액 감면 등을 활용한 유동성 지원이, 중장기적으로는 첨단 제조 기술, ESG 인증 인프라, 현지화 전략 등 산업별 체질 개선이 핵심이다.
정책 목표 또한 ‘물가 안정’에서 ‘산업 복원력 강화’로 이동해야 한다. 기획재정부 역시 산업별 피해 실태를 파악하고, 내년 예산에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준금리 외 ‘정밀 유동성 수단’ 병행 필요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조정보다 앞서 정밀 유동성 공급 수단을 통한 우회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기업어음(CP)·회사채 매입, 담보대출 완화,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수출금융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금융중개지원대출(BOK lending facility)을 통해 반도체·자동차 등 피해 업종에 저금리 자금을 공급하고, 한은-수출입은행 간 정책금융 연계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은 관계자는 “기준금리는 파급 범위가 넓지만 부작용도 크다”며, “지금 필요한 건 타깃을 명확히 한 정밀 수혈”이라고 강조했다.
◇8월 금통위는 ‘숨 고르기’…정책 재설계는 하반기 분기점
이달 28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기준금리 동결 가능성이 높다. 미국 연준이 8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지 않는 만큼, 한은은 정책 방향을 재점검할 시간을 벌게 된다.
정부는 이미 추경안을 마련했고, 세제 개편 및 가계부채 규제 등 주요 변수도 정비되고 있다. 정책 여건이 정리되는 만큼, 이젠 ‘타이밍을 고려한 설계 전략’으로 넘어갈 시점이다.
9~10월 FOMC 결과에 따라 금리 인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통화정책의 목표 역시 단기 자극보다는 중기적 복원력 확보로 전환돼야 한다. 단순한 인하가 아니라, 충격을 흡수하고 산업을 회복시키는 구조적 설계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