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지정된 국가 숲길
(강릉=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걷기가 심신 건강에 좋다는 게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몸이 무겁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뚜벅뚜벅 걷기만 해도 심신이 안정된다는 것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 최초의 국가 숲길
걷기 문화가 정착되면서 전국 곳곳에 걷기 좋은 길이 생겼다.
남한 해안선 4천500㎞를 하나로 연결한 초장거리 도보여행 길인 코리아 둘레길을 비롯해 잘 정비된 국립공원 등산로, 쾌적한 도시공원 산책로, 토닥토닥 걷는 동네 마실길, 아찔한 절벽 위에 난 잔도, 물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는 바닷가 데크 길 등등. 지역 주민의 건강과 편의를 위해, 걷기 길을 조성해 놓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채로운 도보여행 길 중에는 경치가 빼어나거나 역사·문화적 의의가 커 ‘뚜벅이’들이 꼭 걸어보고 싶어 하는 ‘명품 길’이 적지 않다.
금강송이 울창한 대관령 숲길도 걷기 예찬론자의 ‘버킷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다.
한국은 소나무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가 많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군락은 흔하지 않다.
겉껍질이 붉어 적송이라고 부르는 금강송은 목질이 단단하고 우수해 궁궐, 사찰 등의 문화재급 건물 복원용으로 쓰인다.
대관령 숲길은 2021년 지리산둘레길, 백두대간트레일, DMZ펀치볼둘레길과 함께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가 숲길로 지정됐다.
금강송 군락, 고산 습지의 야생화 등으로 인해 생태 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대관령 옛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국사성황사를 품고 있는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앞서 1988년에는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됐고, 2000년에는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 나무 그늘이 짙어 여름에도 걷기 좋아요.
대관령 숲은 1922~1928년 소나무 씨앗을 직접 뿌리는 직파조림 방식으로 조성됐다.
묘목을 심지 않고 씨를 뿌려서 숲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요즘은 직파조림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산에 낙엽이 두껍게 쌓여 씨가 발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장 570여개 규모에 해당하는 약 4㎢ 넓이인 대관령 숲은 조림을 시작한 지 약 100년만인 지난 2018년 일반에 개방됐다.
이곳에 걷기 좋은 숲길 14개, 총 102.96km가 조성돼 있다.
이중 금강소나무가 제일 빽빽한 숲을 지나는 코스가 대관령 소나무숲길이다.
이 코스의 길이는 8.6㎞. 보통 걸음으로 약 4시간 정도 걸린다.
어흘리산림관광안내센터에서 출발하면 삼포암, 솔숲교, 솔고개 입구, 노루목이, 풍욕대, 대통령 쉼터, 금강송정, 숯가마를 지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이다.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솔숲교까지 약 1㎞는 시원한 물소리가 함께 하는 계곡 옆길이다.
폭포 3개가 연이어진 삼포암은 탐방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다.
산길 걷기가 부담스러운 어르신들은 삼포암 방문만으로도 기뻐하신다고 탐방을 지원하는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의 박군서 팀장은 전했다.
솔고개 입구에서 노루목이까지 약 600m는 다리품을 좀 팔아야 하는, 꽤 가파른 길이다.
그 외의 구간은 그리 힘들지 않다. ‘노루목이’ ‘노루목’이라는 지명은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 드물지 않다.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어 오르막은 빨리 뛰어오르지만, 내리막은 잘 내려가지 못하는 노루를 잡기 위해 몰아붙이는 가파른 내리막 지형을 말한다.
이곳 노루목이도 급경사의 내리막 바로 위에 있었다.
풍욕대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람으로 ‘목욕’하는 곳이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이 나무의 가느다란 바늘 잎새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 내는 소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풍욕대에서는 솔바람 소리를 녹음해가는 탐방객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선조들은 솔바람 소리를 송뢰, 송운, 송도 등으로 불렀다. 모두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려서 내는, 물결같이 맑은소리라는 뜻이다.
대통령 쉼터는 2007년 4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쉬었다 간 곳이다.
휴식 차 이곳을 찾은 노 전 대통령은 이 숲을 잘 보존해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쉼터에는 산림청 선정 명품숲길 50선 스탬프가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쉼터 옆 전망대에서는 동해, 강릉 시내, 경포호가 한눈에 잡힌다. 금강송정 옆에서는 지난 2005년 직파 후 성공적으로 발아해 자라고 있는 어린 금강소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어리다고 하지만, 직파한 지 20년 지났으니 사람으로 치면 이미 성년이다. 줄기가 아직 가느다란 20년생 소나무를 보니 나무 한 그루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게 새삼스럽다.
대관령 소나무숲길은 대관령자연휴양림을 끼고 돈다.
산림문화휴양관, 숲속의 집, 청소년수련장, 야영장 등 숙박, 산림욕, 산행, 산림 치유 및 교육 등을 위한 시설과 환경을 갖춘 자연휴양림은 비교적 새로운 개념인 산림복지를 위한 대표 시설이다.
전국 200여개 민·관영 자연휴양림 중 대관령자연휴양림은 1988년 가장 먼저 설립된, ‘1호 자연휴양림’이다. ‘강릉 8경’ 중 하나인 이 휴양림에도 아름드리 금강송이 울창하다.
◇ 대굴령과 도둑재
대관령은 해발 832m 높이로, 태백산맥에 있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성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영동고속도로와 현재는 지방도로가 된 옛 영동고속도로가 지난다.
영동·영서 지방은 대관령을 기점으로 나눈다. 고개의 동쪽이 영동, 서쪽이 영서이다.
한국인의 국토 인식에서 대관령은 빼놓을 수 없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시대에는 영동 유생들이 과거 시험 보러 서울에 가기 위해,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영동의 물산을 영서로, 혹은 그 반대로 실어 나르기 위해 지나던 통로였다.
구불구불 아흔아홉 굽이로 휘도는 길이 가파르고 험해 넘어지면 대굴대굴 구른다는 뜻에서 대굴령으로 불리다가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정착됐다는 설이 있다.
대관령은 보부상이 가진 돈과 짐을 노리는 도둑이 많아 도둑재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대관령 소나무숲길에는 노루목이와 풍욕대 사이에 도둑재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이 고개에서는 유생과 보부상들이 걸어서 다니던 ‘대관령 옛길’이 내려다보인다.
지나가는 보부상의 동태를 관찰하기 좋은 요충지라고나 할까.
대관령 옛길은 현대인들이 탐방할 수 있게 잘 정비돼 있다.
대관령 치유의 숲에서 대관령숲길안내센터까지 약 6.5㎞인 이 길은 건물도 아니고, 공예작품도 아니지만 그 자체가 문화재로 간주된다.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승으로 지정받았다.
대관령 옛길 초입에는 고미술 수집·연구가인 홍귀숙 선생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 2천여 점을 전시해놓은 대관령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대관령 중턱인 반정에는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
이 지역 향리가 사재를 털어 지은 주막은 겨울에 험한 대관령을 넘다 목숨을 잃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쉼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옛길 표지석, 전망대 등이 설치돼 있다.
◇ 백두대간 종주 능선에 있는 선자령(1,157m)
대관령 소나무숲길 외에도 대관령 숲길 14개 코스 중 선자령순환등산로, 대관령 옛길, 국민의 숲길은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선자령은 겨울 눈꽃 산행과 백패킹의 ‘성지’로 불린다.
숲이 울창해 여름에도 시원한 국민의 숲은 체육계 국가대표 선수들의 하계 훈련 장소이다.
선자령은 백두대간 능선 위에 있어 백두대간 종주 산행 경로에 속한다.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을 정도로 풍광이 탁월하다.
유명한 일출, 운해 감상 장소이기도 하다.
바람이 거센 선자령 정상에 서면 수십 기의 풍력발전기, 푸르게 펼쳐진 드넓은 초지가 이국적 정취를 자아낸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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