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 환경칼럼니스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은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여자 주인공 역시 비를 맞으며 그의 곁에 선다. 물론 이 장면은 극 중 인물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지만 우산을 잘 쓰지 않는 서양 문화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산을 잘 쓰지 않는 모습은 영화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과거 유럽에서는 남성이 우산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남성이 우산을 쓰면 나약해 보인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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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사의 상징으로 흔히 중절모, 양복, 그리고 우산을 떠올리지만 정작 우산은 들고 다니기만 할 뿐 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18세기 영국의 상인이었던 조너스 한웨이(Jonas Hanway)는 중국에서 우산을 접하고 이를 런던에 들여온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런던 거리에서 우산을 든 첫 남성으로 회자하지만 당시엔 비를 피하는 모습이 남자답지 못하다며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0년 넘게 우산을 쓰고 다녔고 결국 그의 행동은 우산에 대한 사회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며 우산은 더 가볍고 튼튼해졌고 방수 기능도 향상됐다. 이 과정에서 우산은 남성의 세련된 소품, 즉 ‘신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우산’이라는 개념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고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오래된 기록을 보면 고대 이집트·인도·중국·그리스 등지에서는 햇볕을 피하기 위한 양산을 우산보다 먼저 사용했다. 특히 양산은 왕이나 귀족 등 권위 있는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다. 방수 기능을 갖춘 천이 존재하지 않았고 상류 계층은 비 오는 날 야외에 나설 이유가 없었기에 우산보다는 양산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를 피하는 우산과 햇빛을 가리는 양산을 구분해 부르지만 영어권에서는 ‘엄브렐라’(umbrella)라는 하나의 단어로 통칭한다. 즉, 영어권에서는 두 도구를 기능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한다. 엄브렐라(umbrella)는 라틴어 ‘움브라’(umbra), 즉 ‘그늘, 그림자’를 뜻하는 말에서 비롯했다. 우산은 양산에서 출발했다는 의미다. 우산은 처음부터 실용적 도구이기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후 방수 기능이 더해지고 산업화와 함께 대중화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우산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우산이나 양산을 사용하는 행위가 ‘나약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일부 문화권에서는 남성이 우산이나 양산을 쓰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게 받아들여진다.
18~19세기 유럽에서 검은 우산은 남성의 품격을, 화려한 양산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다. 모네의 그림을 비롯한 유럽 회화 속에는 양산을 든 여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시절 양산은 단순한 실용 도구가 아니라 우아함과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였다. 산업혁명 이후 원단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실용성과 디자인을 모두 갖춘 양산이 대중화했고 상류층 여성들의 필수 소품이 됐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며 양산의 위상은 점차 약해졌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건강함과 여유로운 삶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오히려 햇빛에 몸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뽀얀 피부가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시절이 지나가고 오히려 태닝한 피부가 부유함을 상징하게 되자 양산은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멀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양산의 역사는 깊다. ‘삼국사기’에는 왕실의 의전용 양산인 ‘일산’과 ‘화산’이 등장한다. 근대 이후 서양식 양산이 들어오면서 양산은 신여성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자리 잡았다. 1920~1930년대에는 ‘모던걸’이라고 불리던 신여성들이 잡지와 화보 속에서 양산을 우아하게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다. 양산은 단순히 햇빛을 피하는 도구를 넘어 서구 문물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여성상의 상징이었다. 1960~1980년대에는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 자외선 차단과 외모 관리를 위한 필수품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산은 ‘어르신들이 쓰는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가 점차 시들해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햇볕을 피할 ‘그늘’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변화로 폭염과 자외선은 일상이 됐다. 최근 환경부와 질병관리청은 폭염 대응 수칙으로 양산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나 시민단체에서는 ‘남자도 양산을 쓰자’는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양산은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고 많은 남성이 주변 시선을 의식해 사용을 꺼린다. 한 설문조사 결과 남성의 양산 사용이 ‘어색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절반을 훌쩍 넘었다.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닥치는 요즘, 우산과 양산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일상에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양산은 단순한 햇빛 가리개를 넘어 ‘폭염 대응 장비’로 떠오르고 있다. 기상청은 전국 시도 교육청에 ‘하굣길 양산 쓰기’ 카드뉴스를 배포해 학생들의 참여를 권장했고 대구시와 서울시 자치구들도 출근길 시민과 주민에게 양산을 무료로 나눠주며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양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양산은 기능뿐 아니라 형태와 인식 면에서도 변화하고 있다. 중성적인 색상과 실용적인 디자인은 물론 자외선 차단 기능을 강화한 고성능 제품도 출시되고 있다.
양산의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양산을 사용할 경우 체감온도가 최대 10도까지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산은 단순한 햇빛 가리개를 넘어 여름철 ‘필수 생존템’이라고 할 만하다. 극한 호우와 폭염이 반복되는 기후위기 시대, 우리는 우산과 양산을 함께 챙기는 일상에 익숙해져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일은 더 이상 국가나 지자체의 몫이 아니다. 무더위 속 양산을 챙기고 소나기에 대비해 우산을 준비하는 것처럼 작지만 실천 가능한 행동이 일상의 회복력을 높인다.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지금 대응도 문화가 돼야 한다. 그 출발점은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작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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