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일본 정치는 안정적인 배처럼 대체로 지루하게 흘러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다.
지난 26일(현지시간) 치러진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한 때 비주류였던 극우 성향의 ‘참정당’이 보유 의석 수를 1석에서 무려 15석으로 늘리며 일본 정치 무대에서 주요 경쟁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참정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연상시키는 ‘일본 우선주의(일본인 퍼스트)’ 문구를 내걸며 집권 자민당 및 이미 궁지에 몰린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의 위치를 뒤흔들었다.
이시바 총리에게 지난 한 주는 마치 롤러코스터와도 같았을 것이다.
자민당 연정은 지난해 치러진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한 데 이어 이번에는 참의원 내 다수당 지위마저 상실했다. 이에 당내에서조차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 30일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규모” 거래라고 평가한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체결했다. 이번 합의로 일본 경제는 그동안 절실히 필요했던 안정성을 공급받게 되었으나, 일본의 정치는 여전히 혼란한 상태다.
사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를 구축한 국가 중 하나다. 그동안의 선거 결과 또한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 자민당은 1955년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권을 유지해왔으며, 다른 나라에서 포착되는 포퓰리즘에도 비교적 흔들리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재 자민당은 전후 역사상 최대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단조롭고 따분하기까지 했던 일본의 정치계는 왜 이토록 치열한 격전지로 돌변하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극우 세력에 끌리게 된 것일까.
쌀값 전쟁: 슈퍼마켓에서 포착된 분노
지난 몇 년간 일본 가계는 인플레이션, 높은 물가, 정체된 임금, 경기 침체 속 어려움을 겪었다.
쌀값이 그 대표적인 예다. 쌀값은 지난해 대비 2배 폭등하며, 일본 전국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5kg짜리 쌀 포대의 가격은 현재 4000엔(약 3만8000원)을 웃돈다.
이는 2023년 흉작으로 인한 공급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진 발생과 함께 일명 ‘거대 지진’ 경고로 촉발된 사재기 현상까지 겹친 결과다.
지역 TV 채널과 SNS에는 쌀을 사고자 길게 늘어선 줄을 담은 영상이 잇따라 올라왔다.
도쿄 북부의 한 슈퍼마켓에서 4개월 된 딸과 함께 장을 보고 있던 아베 모모코(36)는 “쌀은 우리의 주식이다. 우리는 언제나 쌀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쌀값 폭등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딸의 밥상이나 모든 사람의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토로했다.
“이렇게 단시간에 쌀값이 폭등하다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을 보고 있던 와타나베 다케시(65)는 “비싸지만 살 수밖에 없다. 쌀 가격은 정부가 통제한다”며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현 농림수산상은 쌀 가격을 낮추고, 공급망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실제로 더 많은 쌀이 시장에 풀렸으나, 가격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경제를 활성화하고 물가를 잡고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부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미국 우선주의’에서 ‘일본 우선주의’로
특히 청년층의 불만이 크다.
참정당 지지 집회에서 만난 청년 하라다 에리코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현 정치 상황에 신물이 난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청년 유권자인 가토 우타는 “간단하다. 참정당이 이토록 큰 지지를 받는 이유는 우리를 대변해서 말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권자들의 이러한 좌절감과 분노는 정치 집회뿐만 아니라 슈퍼마켓에서도 잘 느껴진다. 이 같은 장바구니 물가로 인해 ‘일본 우선주의’ 정당을 지지하게 된 이들도 있으나, 다른 요인들도 있다.
도쿄 소재 템플 대학교에서 아시아학 및 역사를 연구하는 제프 킹스턴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의 상당 부분은 백악관,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땅에서 비롯된 여파라고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사람들의 원시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한편 트럼프의 공화당과 전 세계 다른 우파 운동 및 정당들 간 또 다른 유사점은 바로 이민 문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외국인 이민자 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최근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약 377만 명으로, 전년 대비 약 11% 증가하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인구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탓에 일본 내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고, 세금을 납부하고, 급증하는 노인 인구를 돌보기 위한 이민자 유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청년 유권자 가토는 “(일본의) 법과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외국 이민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금 등 시민들의 부담이 커지면서 삶은 나날이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정당은 더 많은 외국인을 들여오는 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입장이다.
참정당을 창당한 가미야 소헤이 대표는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외국인혐오주의를 조장하려는 게 아니다”면서 “외국인 수용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기에 일본 국민들은 불안과 불만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기자회견장에서는 “다수의 시민들이 외국인들을 위한 사회 보장 및 교육 지원에 너무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민당 소속인 후쿠오카 다카마로 후생노동상이 나서 현 정부가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의료나 복지 혜택을 후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정당의 이 같은 메시지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참정당 지지 집회의 자원봉사자로 나선 54세의 한 남성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국인들이 무섭다. 그들이 난동을 일으키진 않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외국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적은 없다고 인정했다.
남편, 자녀와 함께 참정당 지지 집회에 참석한 35세 주부는 “참정당은 다른 정당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극우 정당의 초점은 일본에 거주하려는 외국인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또 다른, 더 이례적인 표적이 있으니 바로 관광객이다.
‘셀카를 찍으며 무례하게 구는’ 관광객들
엔화 약세로 인해 일본 가계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으나, 외국인 관광객 수백만 명이 일본을 방문했다(외국 돈의 가치가 높아진 덕분이다).
그 결과 일본을 찾는 관광객 수는 크게 늘어,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약 3700만 명이 방문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출신이 대부분이며, 서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일본을 찾았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관광객들이 일본인들이 자부하는 강한 예절 문화를 무시하고 상스럽고 무례하게 행동한다고 비난한다.
지난해 11월, 65세 미국인 관광객이 도쿄의 메이지 신궁의 목조 도리이에 낙서를 한 혐의로 체포됐다.
또한 지난해 후지카와구치코 지역 주민들은 교통 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근처 후지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후지산 기슭, 가와구치 호수 근처 자리한 이 아름다운 마을은 등산객들의 거점으로 자주 이용되며, 뛰어난 자연경관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결국 지역 당국은 후지산이 보이는 시야를 차단하는 가림막을 설치했다.
현지 공무원은 “일부 관광객이 규칙을 따르지 않아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점이 유감스럽다”고 했다.
평생 후지카와구치코에 살았다는 이와마 가즈히코(65)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관광객들은) 도로를 건너면서 전혀 차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여기저기 버리고 갑니다.”
가림막으로 인해 산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셀카를 찍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고, 일부 사건은 영상에 포착되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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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 대한 허위 정보’ 확산
이러한 상황 속 유권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많은 이들이 참정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참정당의 선거 승리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들의 주장을 정당하다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참정당이 일부 관광객들의 무례한 행동과 일본 내 이민 문제를 뒤섞어 이를 하나의 “큰 외국인 문제’로 묶어버렸다고 비판한다.
간다외어대학에서 일본학을 가르치는 제프리 홀 교수는 “참정당은 (외국인들이)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공공질서를 위협한다는 등 외국인에 대한 허위 정보를 유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참정당은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에도 강하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의원 투표 며칠 전, 이시바 총리 또한 외국인이 저지른 “문제 행위나 범죄” 등에 대한 전담 사무국을 신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자민당은 “불법 이민자 근절”을 목표로 내걸기도 했다.
참정당을 창당한 트럼프 추종자
‘정치에 참여하라’라는 의미의 참정당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정점이던 2020년에 창당되었으며, 백신 접종에 대한 음모론을 담은 유튜브 영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미야 대표는 슈퍼마켓 관리자 출신이자 자위대(일본의 군대) 예비역으로, 자신의 “대담한 정치 스타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다.
가미야 대표는 SNS를 통해 이민자들이 벌이는 “조용한 침공”에 대해 경고하는 한편 세금 감면 및 복지 지출 확대를 약속하며 기성 정당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2022년, 참정당 출신 유일한 후보로 참의원 선거에 당선된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영상 속 가미야 대표는 일명 ‘딥스테이트(심층국가)’ 개념을 언급한다. 특정 이익을 보호하고자 군대, 경찰, 정치 세력 등이 뭉쳐 비밀리에 협력하고 있으며, 이들이 선출 절차 없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영상 속 가미야 대표는 “딥스테이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면서 “언론, 의료 분야, 농업 분야, 가스미가세키(도쿄의 관청 밀집 지역으로, 정부 기관을 가리킨다)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여러 논란성 발언을 쏟아내며 SNS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싱크탱크 ‘아시아 그룹’의 린타로 니시무라 연구원은 “선거 기간에 돌입하자 언론과 온라인 포럼 모두 참정당 및 그들의 논란이 되는 발언이나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가미야 대표는 성평등 정책은 “실수”라는 발언으로도 비판을 받았다. 성평등 정책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장려하며 출산을 꺼리게 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가미야 대표는 “‘일본인 우선주의’라는 말은 세계화에 맞서 일본인들의 생계를 재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명했다.
“저는 외국인을 완전히 몰아내거나, 모든 외국인이 일본에서 떠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국인 혐오와 차별주의자로 비판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언론이 틀렸고, 참정당이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정책보다는 열정?
킹스턴 교수는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전달되는 방식이 더 중요했다”면서 가미야 대표의 성공 요인이 정책보다는 열정에 있다고 분석했다.
“이 열정과 감정, SNS가 핵심입니다. 30, 40대 사람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 그가 말하는 모든 걸 믿지는 않지만, 변화를 유도하고 내 고민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청년층의 지지율 증가와 더불어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 내 핵심 보수 유권자 다수도 참정당으로 돌아섰다. 현재의 자민당이 충분히 우파적이지 않다며 불만을 품은 이들이다.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자민당 내 극우파를 대표하던 인물로, 이를 통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유지했다. 후임자인 기시다 후미오와 이시바 현 총리는 자민당 내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세력을 대표한다.
킹스턴 교수는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은 정치적 기반을 잃었던 셈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더 열정적으로 대변해줄 인물을 찾고 있었고, 가미야 대표는 바로 그 열정적인 옹호자”라고 설명했다.
분석가들은 이러한 포퓰리즘 흐름이 일본 정치판에서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지적한다. 정치적으로 신선한 변화를 촉진할 수 있어 보이나, 아직 철저한 검증을 꼼꼼히 거치지 않았다.
현재 집권 중인 자민당의 경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지라도, 지금껏 수많은 정치적 폭풍을 이겨낸 거대한 세력이다.
여전히 외교 분야에서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정당으로, 최근에는 불안정한 세계 질서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세를 헤쳐나가야 했다.
일본 국내적으로 자민당은 흔들리고는 있으나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현재로서는 대체 가능해보이는 대안 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우 세력의 성공은 유권자들의 지지는 당연하지 않다는 새로운 현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안정성을 중요시하던 일본 사회이나, 이제 새로운 세대는 비록 어떤 변화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더라도 변화에 굶주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