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부패기관의 독립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국민들과 약속했다. 전쟁 중에도 시민들이 대규모 반부패 시위에 나서자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에게 도움을 청한 그는 자문을 받은 뒤 이같이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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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BBC방송 등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법치 강화, 반부패기관의 독립성 보장, 러시아의 영향력이나 간섭으로부터 보호를 보장하는 법안 초안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그는 지난 22일 ‘국가반부패국’(NABU)과 ‘특수반부패검찰청’(SAPO)을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의 산하로 귀속시키려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조치에 반발하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반부패 시위를 벌였다. 우크라이나가 지난 수년 동안 두 기관을 중심으로 ‘사법-정경유착 청산’을 공약 삼아 유럽연합(EU)과 긴밀히 협력해왔기 때문이다.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를 포함한 다른 도시에서도 수천명이 시위에 나섰다. 외신들은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을 무너뜨렸던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 이후 최대 규모라고 평가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부끄러운줄 알라” “민주주의에서 후퇴했다” “2014년 친러 정부 시절 ‘독재법’ 악몽을 재현하려 한다”고 외쳤고, 의회를 향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압박했다.
일부 군인들도 군복을 입고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은 군 지도자들로부터 시위에 참석하지 말고 소셜미디어(SNS)에 비판적인 글도 게시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두 다리를 잃은 한 참전 용사는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대통령의 면책 특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등 48명의 야당 의원은 원안의 개정 조항을 철회하는 별도 법안을 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하는 EU와 주요7개국(G7), 주변국과 국제 인권단체 등까지 나서 정보 통제 강화와 권위주의적 권력 장악 시도라며 강력 비판했다. 미국 민주·공화 양당 상원의원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우려를 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결국 영국과 독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논의를 마친 뒤 한발 물러서 기존 입장을 완화하기로 했다. 스타머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잇따라 통화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스타머 총리의 조언대로 국제 전문가와 협력해 반부패 개혁안을 다시 썼다. 균형 잡힌 새 법안을 마련했다”며 새 법안에는 검찰총장 대신 독립적인 반부패기구가 모든 수사권한과 운영상 자율성을 갖도록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가반부패과 특수반부패검찰청 두 기관의 모든 절차적 권한과 독립성 보장을 회복했다”며 법안이 이날 의회에 제출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의회에 법안의 신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우리는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스타머 총리가 반부패 사업에 대한 장기적인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며 조언에 따라 “법안에 대한 전문가 검토에 독일이 참여하도록 초청했다. 프리드리히(메르츠 총리)는 내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외신들은 이번 논란에 대해 “(EU 등 지원국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의 전시 담론에 전례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 민주주의 가치와 국가안보 모두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며 ‘새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국민들과 국제사회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