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2일(현지 시간) 반부패 기관의 독립성을 사실상 훼손하는 법안을 공식 승인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이것은 민주주의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판과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후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유럽연합(EU) 가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반부패 수사·기소 기관, 사실상 검찰총장에 종속
키이우인디펜던트(KI) 등 외신들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국가반부패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사청(SAPO)을 검찰총장이 직접 감독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은 부패 수사 및 기소를 담당하는 2개 기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검찰총장에게 사실상 종속시킴으로써 행정부의 승인 없이는 현직 고위 공무원에 대한 수사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NABU와 SAPO 수장은 대통령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독립위원회가 선출하지만, 검찰총장은 우크라이나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지명하고 여당이 장악한 의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된다.
지난달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루슬란 크라우첸코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2015년 개혁의 표상, 과거로 회귀 우려
이 2개 기관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과 그의 부패한 정권이 축출된 뒤 친서방 개혁의 일환으로 2015년 창설됐다.
NABU는 고위공직자 부패 사건을 수사하며 SAPO는 해당 사건을 감독, 기소한다. 이후 고등반부패법원이 재판을 진행한다.
기존에 검찰총장은 NABU 사건을 이관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새 법은 검찰총장에게 NABU와 SAPO 업무에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사건을 이관할 수 있게 한다. 검찰총장은 변호인의 요청으로 NABU의 조사를 종료할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된다.
◆”전례 없는 속도로 처리”…절차 위반 주장도
이에 앞서 우크라이나 베르호우나 라다(의회)는 이날 이 법안을 찬성 263명, 반대 13명, 기권 13명으로 가결했다.
NABU는 표결에 앞서 발표한 성명에서 “이 법안은 NABU와 SAPO의 독립성을 파괴하며 활동을 실질적으로 검찰총장에게 종속시킨다”면서 “2015년 이후 구축된 부패 방지 인프라가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이 법안은 전례 없는 속도로 빠르게 처리됐으며 법적 절차를 위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KI는 “해당 법안은 의회에서 서둘러 처리됐다”며 “수정안 제출부터 표결, 루슬란 스테판추크 의장 승인과 대통령 서명으로 법안이 발효되기까지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전례 없는 속도”라고 지적했다.
야당 의원들은 해당 법안이 절차를 위반해 강행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한 야당 의원은 “오늘 의회에서 일어난 일은 충격적이었다. 명백한 절차적 위반에도 불구하고 법안이 강행 처리됐다”며 “여당 의원들은 박수를 쳤고 그것은 ‘마녀들의 집회(coven)’와 같았다”고 비판했다.
여당인 ‘국민의 종’ 의원조차 “수정안이 투표 15분 전 나와 어떤 내용이 바뀌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로 말했으며, 찬성표를 던진 의원조차 “솔직히 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면서 “하지만 대통령이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을 믿는다”고 했다.
◆”EU 가입 희망 좌절시킬 수도”
이 법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가디언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의 정부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시위가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우크라이나 반부패 기관을 약화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법안을 승인했다”면서 “이것은 언젠가 EU에 가입하려는 희망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KI도 “독립적인 반부패 기관을 두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며 “이 법이 우크라이나의 유럽 통합을 막을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