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파충류도 장기적인 감정 상태, 즉 ‘기분(mood)’을 가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거북이를 대상으로 한 행동 실험에서, 포유류나 조류와 유사하게 모호한 상황을 낙관적 혹은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정서 반응이 관찰된 것이다. 이는 파충류가 단순한 반사적 생명체라는 오랜 인식을 뒤집는 결과로, 동물복지 기준과 관련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이고 강렬한 ‘감정(emotion)’과 달리, ‘기분(mood)’은 오랜 기간 지속되는 정서 상태를 의미한다.
해당 연구는 국제학술지 ‘Animal Cognition’ 2025년 7월호에 게재됐다.
◆ 파충류도 느끼는 ‘기분 상태’…정서 실험으로 확인
영국 링컨대학교(University of Lincoln) 연구팀은 붉은발거북(Chelonoidis carbonaria) 15마리를 대상으로 인지 판단 편향(cognitive bias)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은 본래 인간 심리학에서 개발된 방법으로, 모호한 상황에서 낙관적으로 해석하는지 혹은 비관적으로 반응하는지를 통해 대상의 기분 상태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실험에서 연구팀은 먹이가 반드시 주어지는 위치와 전혀 없는 위치를 반복적으로 학습시킨 뒤, 그 중간에 빈 먹이통을 두고 거북이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 결과, 자연에 가까운 다양한 자극과 충분한 활동 공간이 제공되는 환경에서 사육된 거북이일수록 애매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진은 이를 긍정적인 기분 상태를 나타내는 행동으로 해석했다.
◆ 불안 반응 실험서도 정서 차이 드러나
연구팀은 이와 함께 불안 수준을 측정하는 별도의 실험도 실시했다. 낯선 물체에 대한 반응,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놓였을 때의 탐색 행동 등을 관찰한 결과, 인지 편향 실험에서 낙관적인 판단을 보인 개체일수록 불안 반응이 덜하고 환경 탐색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기분 상태와 행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이번 연구는 붉은발거북이 단기적인 감정이 아닌, 보다 지속적인 기분 상태를 지닌다는 최초의 실험적 증거다. 지금까지 파충류는 학습 능력이나 문제 해결 등 일부 인지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정서적 경험은 거의 없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연구는 그 내면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동물복지 기준 변화 촉진할 가능성
연구를 이끈 애나 윌킨슨(Anna Wilkinson) 링컨대학교 동물인지학 교수는 “동물복지 문제는 특정 종이 정서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해야 한다”며 “파충류가 반려동물로 점점 흔해지는 만큼, 그들이 포획 환경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물행동 및 복지 전문가인 올리버 버먼(Oliver Burman) 교수는 “이번 발견은 파충류가 경험할 수 있는 내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확장시킨다”며 “이는 사육 환경뿐 아니라 야생 개체와의 상호작용 방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감정과 기분의 진화적 기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포유류·조류와 수억 년 전에 분기된 파충류가 정서 상태를 지닌다는 점은, 정서적 감각이 동물계 전반에 보다 널리 퍼져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